KEYWORD ONE PAGE <술> ㅣ 최나영
종일 카페에 있으며 전 저만의 다락방을 상상해요. 다락방 속에는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에 존재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이 정돈되어 있죠. 그 다락방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만나곤 하죠. 저는 저만큼 신비로운 존재를 이제껏 만나본 적이 없어요.
작가 프로필 ㅣ 최나영
기독 신학교 출신인 그녀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에 관심이 많다. 매일 그녀의 성에 들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하며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녀는 차라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에 잡히는 외투 하나를 몸에 걸친다. 맨발을 단화에 구겨 넣으려다 말고 다시 방으로 가 양말을 찾는다. 그러다 가까이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오래된 목도리를 잡아 목에 두른다. 목도리니까 목에 둘렀겠다 생각하는 것이지 모양새만 보면 얼굴에 둘렀다는 것이 맞겠다. 칭칭 감긴 얼굴에 양말 생각은 저리 멀어진 그녀는 빈 책상을 더욱 비어 보이게 하는 환한 스텐드 머리를 필요 이상으로 꾹 눌러 재운다. 곧 다시 들어올 것인데도 그녀는 방 안을 한번 크게 둘러본다. 그녀 말고는 누구도 살지 않는 집에서 그녀는 빈 방 문을 힘껏 꽉 닫는다. 그제야 현관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생각지 못한 거센 바람의 마중에 순간 움찔한다. 급히 접힌 그녀의 어깨를 따라 그녀의 등까지 반으로 접히기 직전이다. 그녀는 힘 센 바람에 하릴없이 펄럭이는 트레이닝복을 온 다리로 느끼며 시린 어깨를 둥글게 접은 채로 앞으로 걷기 시작한다. 둥글게 말린 그녀의 작은 등 뒤로 그녀를 향하던 현관문은 스르르 집을 향해 뒷걸음친다. 삐리릭.
자동으로 잠기는 현관키를 설치한 것은 그녀인데 자동잠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 소리를 그녀는 왜 늘 같이 듣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얼마 전 그녀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거금을 들여 자동잠김 기능이 있는 도어록을 설치했다. 그러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곧장 삐리릭 하고 매정히 잠겨 버리는 현관문이 그녀는 매번 낯설다.
며칠 전부터 그녀의 머릿속 오솔길들이 엉켰다. 나무도 풀도 그녀가 정한 자리에 심었고, 오솔길 하나하나 그녀가 공들여 만들어 온 숲이다. 그런데 그 숲이 그녀 없이 엉켰다. 나무도 풀도 제자리가 아니다. 길들도 지들 맘대로다. 이럴 때 가슴 속 대양이 일어나 스나미를 불어 머리숲을 쓸어버리면 좋으련만 어쩐 일인지 매일 들고일어서는 가슴 속 파도도 오늘 따라 잠잠하다. 아 눈알 시려. 실은 발이 시렵던 그녀는 목도리와 맞바꾼 양말이 아쉬워 시린 눈알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그래도 나오길 잘 했다, 지구가 뿜는 바람이라도 맞아라. 그녀는 찬 바람 속에서 머리숲을 세차게 흔들어 본다.
직접 가꾸어 온 머리숲에서 허무하게 길을 잃을 때면 그녀는 책상머리맡에 앉는다. 그리곤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글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그냥 문장들이다. 그러다 보면 그녀의 머리숲은 다시금 그녀가 걸을 길을 보여준다. 머리숲에서 그녀는 목적지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한다. 문장들로 걷는 길. 그 길을 걷는 것이 그녀의 살아가는 첫 번째 의미이다. 그런데 문장들도 그녀를 나 몰라라 할 때가 있다. 문장들로 걸을 수 없게 되면 오늘처럼 그녀는 몸으로 걷는다. 이것이 그녀의 살아가는 두 번째 의미이다.
어, 이 가게가 원래 있었나?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2년이 좀 안 됐다. 이제는 동네 지리를 어느 정도 외울 법도 하건만 늘 걷다 보면 길을 잃곤 한다. 길을 잃은 그녀의 핑계는 언제나 이것이다. 아, 원래 없던 가게가 생겨서 헷갈렸네.
목적지를 두고 걷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다. 산책에 목적지가 어디있느냐며 당당하게 길을 잃곤 하는 그녀다. 없는 길을 걷는 그녀고, 잃기 위해 길을 걷는 그녀다. 그러면서도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면 그녀는 마땅한 변명거리를 서둘러 찾는다. 물론 그 변명거리는 언제나 그녀의 외부에서 발견된다.
뭐, 생각 없이 걸은 내 탓이고, 이 가게는 원래 없지 않았겠고.
실은 그녀가 알고 있듯 원래부터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 가게에게 괜히 미안해진 그녀는 가게로 들어서 캔맥주 큰 놈으로 하나 집어 카운터에 내려 놓는다. 아저씨, 얼마에요? 혹시나 필요할까 굵은 빨대로 손을 뻗으며 말한다. 어이구, 아가씨 안 추워? 하면서도 얼른 계산해 주시는 아저씨를 향해 그녀는 많이 파세요, 넙죽 인사하고 나온다. 아, 장갑 생각을 왜 못했지. 매서운 바람 속에서 냉랭한 캔맥주를 그보다 더욱 냉랭해진 손으로 따려다 말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한다. 그러기도 잠시 벌써 몽글몽글 입구를 향해 오르는 맥주거품을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어 빨아 먹는다. 혹시나 필요할까 했던 빨대는 따뜻한 호주머니 속에 그대로 있다. 그녀는 다시 걷는다. 그러다 멈춰서서 한 모금 크게 마신다. 그리고는 다시 걷는다. 또 멈춰서 한 모금. 어느새 문장들이 그녀를 뒤따라 걷는다. 이제는 그녀의 발도 눈알도 괜찮아졌다. 대신 그녀의 손은 거의 마비 상태가 되었다. 그녀의 잃은 길 위에 가로등이 켜져 있다. 나올 때도 가로등이 켜 있었나? 그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본격적으로 길을 잃은 기분이다. 아니, 본격적으로 길을 잃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맥주는 날카롭게 조각나 흩어진 그녀를 데려다 둥근 길 위에 조심스레 놓는다. 이 둥근 길을 아무렇게나 걷다 보면 그녀의 찢겨 흩어진 조각들이 어느새 서로 만나 둥글게 선다. 맥주 거품이 둥글둥글해서 그런가? 그녀는 유치원생도 안 할 듯한 웃기지도 귀엽지도 않은 말을 뱉으며 허공을 향해 히죽거린다. 그녀의 마음이 둥그레진다. 어쩌면 정말 맥주 거품이 둥글어서 그런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그녀는 술에 약하다.
히죽거리며 허공을 보던 그녀의 눈에 세상이 보인다. 그 세상 속 사람들이 보인다. 그녀처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녀는 투명하게 세상을 보기 위해 애쓴다. 그녀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투명하게 본다는 것은 마치 깊고 투명한 물을 바닥까지 꿰뚫어 보듯 한다는 의미이다. 성실하고도 꾸준하게 만나온 그녀의 하루들을 가만히 쌓아 놓고 보니 타자를 투명하게 본다는 것은 자기가 투명해진다는 것과 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세상을 세상 그대로 바로 보고싶은 그녀의 갈망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그대로 투명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을 낳게 했다. 그것은 분명 둥글게 연결되어 있었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앉아 아무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고, 아무 길을 따라 아무 걸음들을 걸어 나가고, 문득 나타난 아무 가게에서 아무 맥주나 집어 나오는 그녀의 어느 늦은 오후는 지금 그 둥근 곡선을 걷고 있다. 그녀는 어디서인지 무언가가 맑아져옴을 느낀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걷다 보면 그녀를 에운 딱딱한 껍질은 어느새 툭툭 떨어져 나간다. 이제 곧 그녀는 그녀만의 투명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울 때나 시원한 맥주가 맛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이제 제법 가벼워진 캔맥주를 서운한 듯 바라보며 말한다. 캔맥주가 가벼워진만큼 바람은 더 무겁고 매서워졌다.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차고 강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이제는 놓으면 날아갈 듯 비고 얇아진 캔맥주를 쥐고 그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걷는다. 그녀가 앞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은 그녀 앞에 놓인 땅을 딛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목적도 목표도 없다. 발을 딛어 앞으로, 앞으로 걸을 뿐이다. 바람은 왜 그녀의 등뒤로 걷는가. 그녀는 모른다. 바람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인가. 그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바람은 그냥 그녀의 등뒤를 향해 가고 있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람에게 물을 수 있는 자도 바람을 잡을 수 있는 자도 없다. 바람은 지금 그냥 불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 그냥 걷고 있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 걷던 그녀는 바람이 차고 강할지언정 둥글다는 것을 느낀다. 바람이 둥글다. 어쩌면 조각난 바람들은 삐죽할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조각들처럼. 조각난 바람들이 한 길에서 만나 이렇게 크고 둥근 바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캔맥주 한 잔에 둥글어진 그녀처럼. 그녀는 언젠가 바람과 같아지고 싶다라 적었던 문장을 떠올린다. 길을 잃은 바람. 집이 없는 바람.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바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를 바람. 목적이 없어도 목표가 없어도 단지 부는 것만으로 할 일을 완전히 이루는 바람. 조각난 것들을 하나로 품어 한 길로 가게 하는 바람. 둥근 바람.
둥근 바람에 잠긴 그녀의 발그레한 볼 위로 씩씩거리는 찬 바람이 한 번 더 세게 덮친다. 그녀는 캔맥주를 쥔 채로 얼어 붙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억지로 집어 넣고선 그만 돌아선다. 돌아선 그녀는 다시금 앞으로 걷는다. 이렇게 앞으로 계속 걷다 보면 그녀의 빈 집에 도달할 것이다. 이제 바람은 그녀의 앞을 향해 달린다.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며 달린다. 바람과 같이 걸으니 한결 걸음이 가볍다. 그녀의 발들이 거저 걸어진다. 그러나 집 앞까지만이다. 집 안까지 바람과 함께 들어갈 수는 없다. 그곳은 그녀 혼자 걸어들어가야 한다. 뒤로 달리는 바람도 앞으로 달리는 바람도 없는 집으로 그녀는 혼자 걸어 들어가야 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아직 바람과 함께 걷고 있는 그녀는 아무 노래나 나직이 흥얼거린다. 아무 노래나 흥얼거린다는 것이 하필 지구가 둥글다는 노래다. 그냥 앞으로 계속 걷다 보면 지구는 둥그니까 우리가 모두 하나 되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둥글디 둥근 노래다.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자꾸 걸었더니 저기 꽤 가까이에 홀로 선 그녀의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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