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주제 <이사> ㅣ 이상은
갑자기 얻는 깨달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유지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작가 프로필 ㅣ 이상은
Keyword: 연극, 여행, 춤, 다이어리, 팟캐스트
사랑은 '뜨거운 해'가 아니라, '아낌없는 나무'이다.
-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시점에서 사랑 이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p.6 알랭 바디우의 서문에서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 ‘에로스’는 주체를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질 때, 타자를 경험할 수 있고, 이 과정을 통해 나르시즘의 지옥에서 해방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동기부여와 자기 주도를 통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길 강요당하고 있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사람들은 자기착취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이런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어 내린 상태이다. 저자는 영화 ‘멜랑꼴리아’를 예로 들면서 나르시즘의 감옥 ‘우울증’에서 빠져나오도록 에로스가 자신과 타인을 구하는 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우울증 때문에 결혼식을 망치고, 새신랑과 헤어지게 된 저스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지구의 종말을 가져올 행성이라고 예견되는 ‘멜랑꼴리아’가 다가옴에 따라, 저스틴은 서서히 우울증에서 벗어나, 언니 클레어와 조카를 따뜻하게 보살핀다. 치유와 각성의 효과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타난다는 게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자주 들려지는 음악 ‘Tristan und Isolde 서곡’은 에로스와 죽음, 묵시록과 구원의 근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죽음으로 완성하는 서양 중세의 이야기에 기반을 둔 음악인데, 재앙의 변증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극적인 순간에 자기 비움이 일어나, 나르시즘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내가 펼쳤던 에로스적 사랑이 떠오른다. 그냥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하게 타자를 위했던 경험을 통해, 내 일상은 더 행복했고 나 자신의 영역은 확장되었다. 결국 상처를 받으며 끝났는데, 돌이켜보면 나는 나르시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않았고 진정 타자의 실존에 관해 근원적인 경험이 부족했다. 자연스레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베풀거나 앞장서서 조직을 위해 일하는 주변 사람들이 떠오른다. 닮고 싶어 한 걸음 내딛지만 다시 뒷걸음친다.
나뿐만 아니라 요즘 많은 사람이 손해 보거나 상처받기 싫어서 점차 마음의 문을 닫아 나르시즘에 갇히게 된다. 사랑은 하고 싶으니까 썸만 타다가, 진짜 연애는 못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 ‘에로스의 종말’이 의미심장하다. 타자는 오직 ‘어찌할 수 없음’, 즉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어떤 것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부딪칠 용기가 있는지’ 자신과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된다.
사랑을 생각하면 이전에는 열정적인 해를 떠올렸는데, 이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오른다. 내 생각이 바꿨다고 해서 당장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실천해야겠다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 나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대 사회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나 역시 진정한 에로스적 사랑을 해야 '나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생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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