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냄비밥

신장개업 상호미정ㅣ 곽정빈

by 한공기
KakaoTalk_20160508_223016445.jpg 연구원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내일 아침까지를 생각해서 2인분의 밥을 하기로 한다. 밥솥 안에 들어있던 계량컵을 꺼내 컵을 가득 채우도록 쌀을 담는다. 2인분이니 두 번이다. 그렇게 계량컵으로 두 번의 쌀을 싱크대 흐르는 물에 충분히 씻어준 후에 전기밥솥에 넣고 밥솥 내벽에 2라고 적힌 눈금까지 물을 채운다. 이제 뚜껑을 덮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티브이를 틀어놓고 밀린 빨래를 돌린 후에 침대에 누워 이번 달 고지서를 천천히 확인한다. 어느샌가 날이 쌀쌀해져 에어컨을 틀지 않아서인지 전기료가 전 달보다 적게 나왔다. 고지서를 쥔 팔을 침대 밖으로 떨어뜨리며 눈을 감는다. 오늘따라 유독 피곤한 것이 스르르 잠의 문턱으로 빠져든다. 상관없다. 어차피 40분 가량이 지나면 밥솥에선 알람이 울릴 것이다. 혹여 밥을 안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한들 걱정이 없다. 취사가 끝나면 자동으로 보온모드로 들어갈 것이고, 한참이 지난 후에 밥솥을 열어봐도 윤기가 좔좔 흐르는 막 지은 밥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난 전기밥솥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밥과 물을 밀어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어떻게든 밥은 되어 나올 테니까. 대학교에 입학만 하면, 취업만 하게 되면, 해가 지나 초년생 티를 벗어내고 상급자가 된다면, 나이 서른을 넘고 독립만 하게 된다면... 매번 다른 곳 다른 위치였지만 어떻게든 그 타이틀을 얻고 나면 굳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그 삶은 알아서 잘 굴러가게 되지 않을까라며 말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윤기와 풍미가 흘러넘치는 밥이 다 되었다며 절로 알람이 울릴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매번 그 밥은 되거나 질기 마련이었다.


직전 밥이 너무 질었던 모양이다. 요즘의 난 소심하다. 저녁 여섯 시만 되면 칼같이 자리를 뜬다. 상급자로서의 책임은 거부하고 하급자로서의 궂은 일은 마다한다. 이 일은 밥벌이일 뿐이라고, 빌어먹을 사명감 따윈 안중에도 없다고, 이 일에 난 최소한의 노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걱정만을 안은 채로 삶을 영위할 것이라 다짐한다. 하지만 여차하면 고개를 스멀스멀 들고 일어서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낀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몸을 일으켜 밥솥은 밥솥대로 내버려 두고 기어코 냄비 밥을 올려 보기로 한다. 쌀의 양도 물의 양도 감으로 잡았다. 타닥타닥 가스 불이 점화하고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냄비 뚜껑이 들썩거리며 밥물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불을 죽이고 뚜껑을 잠시 열었다가 다시 덮는다. 물이 좀 많았던 걸까 후회하는 찰나에 밥물은 다시금 흘러나온다. 전전긍긍하며 좀처럼 가스레인지 앞을 떠나지 못한다.


실은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직전 밥은 아주 망쳐버렸는데 어찌됐든 새 밥은 다시금 안쳐버렸고, 자라보고 놀란 가슴에 솥을 들여다 볼 용기는 없으면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울릴지 모르는 알람만을 무턱대고 기다리고 있는 꼴이었다. 더구나 여섯 시 정각이 되자마자 불과 걸어서 5분 거리인 집으로 부리나케 돌아와서는 침대에 벌러덩 나자빠져 엉덩이나 긁어대는 꼴이라니... 그 빌어먹을 밥벌이를 제외한 시간 동안 난 퍽이나 절실한 삶을 살고 있었구나.


결국 알람은 울리지 않은 채로 냄비 밥은 질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완벽한 밥을 짓는 법은 그만큼의 된밥과 진밥을 먹어내면서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 설령 진밥인들 된밥인들 어떠한가? 진밥은 겉절이를 곁들여 먹으면 될 일이고 된밥이면 후에 볶음밥으로 먹으면 될 일이다. 어차피 밥은 매번 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이 밥을 어떻게든 먹어내고 다시금 냄비 밥을 할 그때엔 한결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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