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갑자기 기자 한 명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은미란 씨, 같은 디브이에이 멤버였던 장난아 씨의 자살에 충격이 크실 텐데요.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미란은 황급히 선글라스를 썼다.
“잠깐만요! 은미란 씨. 드라마 컴백을 앞두고 전 멤버의 자살이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하시나요?”
당황해 하는 미란에게 기자는 집요하게 녹음기를 들이 밀었다. 시내가 참지 못하고 기자에게 화를 냈다.
“이봐요, 기자 아저씨. 너무 하신 거 아녜요? 친구가 죽었는데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 왜 들어오세요? 연예인은 편하게 조문도 못 하나요?”
시내가 언성을 높이자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의 시선이 기자에게 향했다. 기자는 조문실 쪽을 힐끗 봤다. 조문실에는 아직도 누군가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기자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참, 전화해야 하는데 깜박 했구먼.”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자의 등에 대고 시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왜 질문 안 해요? 나 최시내라고! 나도 디브이에이 멤버였다구!”
기자는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몇몇 사람들이 쳐다보며 웅성거렸지만, 곧 자신들만의 대화로 돌아갔다. 시내는 미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이제는 내가 누군지 관심들도 없다. 최시내 다 죽었네. 이제 일반인 다 됐어.”
“시내야, 너 취했어.”
미란이 시내를 말렸다.
“괜찮아. 얼마 안 마셨어. 넌 저런 거 대꾸하지 마. 가자. 네 남편님은 어디 갔어?”
현우가 앉은 테이블에는 영화감독과 조감독을 비롯한 예닐곱 명이 함께 있었다. 현우 옆에는 주연 여배우인 장소영이 앉아 있었다. 미란과 시내가 다가가니 마침 그 테이블의 무리들도 일어서고 있었다.
“아, 여보. 여기 인사해. 최중섭 감독님, 감독님, 은미란 아시죠?”
“안녕하세요.”
“아, 은미란이. 소식 들었어. 이번에 드라마 컴백 한다면서. 미모는 여전하군 그래. 다음에 영화에서도 한번 봐야지, 응?”
최 감독이 미란의 어깨를 노골적으로 쓰다듬었다. 현우는 짐짓 딴 청을 했다. 미란은 미소 지으며 살그머니 몸을 뺐다.
“나 지금 바로 촬영장으로 가. 아마 늦을 거야. 혼자 괜찮겠어?”
“시내랑 같이 있을 것 같아요. 걱정 말아요.”
미란은 말을 마치고 나서 마침표를 찍듯이 미소를 덧붙였다.
“차는?”
“오빠가 가져가요. 나는 택시 부르거나... 뭐...”
“걱정 말아요, 현우 오빠. 내가 사모님 자알 모실게요.”
시내가 미란의 등 뒤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확 풍기는 술 냄새에 현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시내가 얼른 덧붙였다.
”이미 대리 불렀어요. 호호...”
“그래, 다음에 보자.”
현우는 서둘러 영화팀을 쫓아 나갔다. 장소영이 쪼르르 현우의 팔짱을 끼는 모습을 미란은 못 본 듯 외면했다.
미란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시내는 호들갑을 떨었다. 창밖에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도로의 오렌지 빛 가로등 너머 아파트 단지에도 하나 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와, 경치 좋다. 비싼 아파트는 역시 다르구나. 밤에 야경 보면 진짜 끝내주겠다. 근데 너 그거 아니? 강이 보이는 집에 사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더라. 그래서 난 물가에 있는 집은 좀 별로야.”
시내는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액자로 관심을 옮겨갔다.
“와, 저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지? 우리나라 최고의 광고 감독이라는 주원형 작품! 너 실물보다 훨씬 잘 나왔다. 광고용 카메라는 렌즈가 특별하다면서? 나도 저런 사진 한 번 찍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난 어쩌다 그 흔한 시에프 하나 못 만나보고 아줌마로 전락해 버렸다니...”
시내는 자신의 뱃살을 주무르며 탄식을 내뱉었다.
“야, 너 애 없는 게 다행이야. 그래서 넌 아직도 날씬하잖아. 나 봐라. 수아 낳고 10킬로나 불었다. 옛날의 내 몸매는 애가 다 뺏어갔다는 거 아니니.”
시내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머리맡에 놓여 있던 실물크기만한 펭귄 인형을 품에 안았다.
“와, 이거 아직도 가지고 있네. 이게 언제 적 거지? 너 2주년 결혼기념일 때 아니었나?”
“맞아. 기억하고 있네?”
“당연하지. 결혼기념일 선물로 펭귄인형을 받은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다.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니? 난아가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시내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미란은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시내의 옆에 앉아 펭귄 인형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난 펭귄이 너무 좋아.”
댄스 트레이닝으로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난아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귀엽잖아.”
“나도.”
열아홉 살의 미란과 시내가 맞장구쳤다.
“아냐, 펭귄은 겉으로는 귀엽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처절하게 사는 동물이야.”
“야, 무슨 펭귄이 처절하냐?”
시내가 비웃었다. 난아는 두 손으로 발바닥을 잡고 바닥을 뒹굴 거리며 대답했다.
“펭귄은 절대 힘든 티를 내지 않고 귀여움으로 승화하거든. 그래서 우리는 펭귄을 보러 가야 돼. 그래야 인생의 숭고함에 대해 깨닫고 불평하지 않게 되는 거야.”
“야, 너 되게 노땅 같애.”
시내가 난아를 놀렸다. 난아는 그 말을 무시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이 힘든 지옥훈련을 극복하고 귀여움으로 승화해야 하는 거지.”
시내와 미란은 배를 잡고 웃었다. 시내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 그럼 펭귄을 보러 가자. 우리 완전 성공해서 남극으로 순회공연 가는 거야.”
“그거 좋겠다. 펭귄들 앞에서 우리 노래를 불러 주자.”
“펭귄이랑 같이 춤도 추고.”
시내는 난아의 두 발을 잡고 서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난아는 누운 채로 버둥거렸다. 미란은 두 사람의 주위를 빙빙 돌며 노래에 가사를 지어내서 불렀다.
“난 펭귄이 좋아. 펭귄을 보러 가자. 남극, 펭귄, 남극, 펭귄.”
시내와 난아는 미란의 노래에 맞춰 안무를 맞췄다. 펭귄 앞에서의 공연을 상상하며 세 아이들은 깔깔댔다.
결혼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택배가 도착했다. 무릎 높이의 박스였다. 해외에서 보낸 송장을 보고 미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우는 박스 안을 들여다보고 소리를 꽥 지르는 미란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란이 평소에 펭귄 예찬을 하던 걸 기억한 센스 있는 선물이었다.
“오빠, 너무 고마워. 오빠 최고야, 진짜 최고의 남편이야!”
미란이 현우의 등에 뛰어 올라 현우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현우는 그런 미란을 등에 업고 거실을 빙빙 돌았다.
“그나저나, 너는 네 남편이랑 괜찮은 거니?”
한 잔을 이미 비우고 두 잔째를 홀짝거리던 시내가 갑자기 물었다.
“요즘 현우 오빠, 장소영이랑 말도는 거 알고는 있어?”
“장소영? 걔랑은 이번에 영화 같이 찍잖아. 그게 뭐?”
“지난번 영화도 걔랑 찍었잖아. 그리고 둘이 데이트 하는 거 본 사람들이 많아. 지나치게 가까워 보인다던데.”
“영화 상대역 만나면 다 데이트인가? 현우오빠는 원래 상대역이랑 그렇게 친근함을 쌓는 스타일이라 그런 것뿐이야.”
“그래, 그렇게 너하고도 결혼까지 갔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내가 먼저 말을 뗐다.
“사실은 너 알면서 시침 떼는 거지? 넌 꼭 그러더라. 난아도 네가 1년 전부터 연락 끊었다며. 우리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되잖아. 뭘 그리 감추니?”
“감추긴 뭘 감춰? 넌 나랑 현우오빠 사이가 나빠지기를 바라는 사람 같다? 우리 둘이 아무 문제없다고 하는데 왜 그래? 장소영이랑 친한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미란은 잔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시내가 위스키 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사이가 나빠지기를 바란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친구니까 당연히 신경이 가서 그러는 거지. 걱정도 되고. 나야 누구보다도 너랑 그 바닥 생리를 잘 아니까... 너랑 현우오빠랑 백 퍼센트 서로 사랑해서 한 결혼 아니라는 거 뻔히 아는데.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었잖아.”
“누가 그래?”
미란이 소리를 빽 지르는 바람에 시내가 따르고 있던 위스키가 왈칵 넘쳤다. 시내는 미란을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야, 너 드라마 찍을 때, 그 배역 장민태 사장이 너 지목해서 들어갔던 거잖아. 민현우를 자기가 길에서 캐스팅해서 스타로 키워냈는데, 나이 먹고 어린 신인들한테 밀리게 되니까 이슈를 만든다는 게 한창 인기 있던 아이돌 가수 디브이에이 리드보컬과의 연애설이었지. 22살의 순진했던 은미란은 장민태의 예상대로 탑 스타의 사랑에 푹 빠진 아이돌 역을 잘 해냈고, 덕분에 둘 다 기사회생 했지. 민현우는 멋진 애인, 자상한 남편으로 모든 여자들의 로망으로 떠올랐지. M 엔터테인먼트는 승승장구하게 됐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잖아?”
“넌 어떻게 친구라는 애가... 그런 헛소문을 믿는단 말이야?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리고 장 사장님도 얼마나 좋은 분인데...”
정색을 한 미란의 말에 시내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깔깔거리고 웃었다.
“뭐? 얘 좀 봐. 장 사장이 좋은 사람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너 그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우리 팀 해체시키고 기획사도 공중분해 시킨 거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그 때, 우리 기획사가 그렇게 없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어. 너희들도 장 사장님이 뒤 다 봐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난아는 혼자 다른 기획사로 가버리고 너는 사업 하겠다고 이 바닥에서 떠나 버렸잖아.”
미란의 목소리에는 원망의 빛이 섞여 있었다. 시내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사업한다고 가수활동 접었는데? 장 사장이 나한테 어떤 조건을 제시했었는지 알아? 그건 완전 노예계약이었다구. 난아도 그 때문에 기획사 옮기고 솔로 데뷔한 거야. 들리는 말로는 장 사장이 자기 조건 거절했다고 난아 앨범 성공 못하게 막았다는 소문도 있어.”
“말도 안 돼....”
미란은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아니면 아무것도 안 듣고 안 보려 했던 것 아냐? 지금 현우 오빠랑 장소정 사이를 애써 부인하려 하는 것처럼? 너 민현우랑 진짜 행복한 거 맞니?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한국의 브란젤리나 커플이니, 잉꼬부부니 이런 거 다 진짜 맞냐구. 아, 씨발, 솔직하게 좀 말해 봐. 왜 우리한테도 숨기는 건데?”
시내는 차라리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미란은 입을 벌린 채 얼굴을 찡그렸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계속>
화이 님의 글을 읽고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