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환상곡 ㅣ 신정훈
저는 글을 막 씁니다. 브레인스토밍하듯 손가락 가는대로 놔두는 식입니다.
작가 프로필 ㅣ 신정훈
현상을 쿨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즉흥적인 글쓰기 과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몇 년 전에 나는 말하는 걸 싫어했다. 특히 고민을 말이다. 입 밖으로 꺼내면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이 너무 하찮게 됐다. 타인은 나의 고민을 후려쳐서 일견 합리적인 조언을 했다. 내 머리속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었다. 온전히 표현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론은 나도 1초의 고민 없이 내릴 수 있는 것으로, 실효성이 없었다. 그래서 함구했다. 타인에게 얻을 수 있는 해결책은 고민이라 규정하기도 전에 내가 즉석에서 낸 1차 처방일 뿐이다. 그 처방이 틀렸기에 고민이 된 것이다. 말을 할수록 가벼운 인물이 됐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왜 이렇게 시답잖았을까?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는데 우울했다(이 표현 자체가 후려치기지만 이해를 위한 예로 사용한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관념 버전이다. 나의 외관은 그대로인데, 아무 이유 없이 알맹이가 변했다. 내 알맹이가 벌레가 됐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실은 더 복잡했기 때문이다. 벌레라고 말한다면 그냥 벌레만 남는다. 이것은 비유다. 그러니까 다양한 무의식과 경험과 잠자는 자세가 만든 결과다. 감정과 경험과 무의식과 외적 자극의 복합체가 규정을 통해 여과된다. 내가 우울을 꼽으면 우울만 남고 나머지는 소거된다. 다양하게 말해도 말 밖은 소거된다.
나는 그 안에 다른 것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말 밖에 있는 것이 죽으니까. 상대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백프로 공감하지 못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포함된다. 나도 그들의 고민과 생각 감정 어느 하나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구조주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 맥락을 알기 위해선 그의 지금이 형성시킨 본질을 알아야 한다. 우린 모두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을 차치하고도 상대가 최대한 알아듣게 하려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구체적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함구했다. 나는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너의 입으로 가볍게 태어날 바에야 자폭하겠다.
인문학과 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규정하는 도구를 많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이 규정에 도움이 된다.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범위를 넘어 밖에 있는 이야기를 한다. 무의식 이야기, 기호로 풀어본 생각과 논리 구조,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나눈 세계, 다양한 사상과 이론들이 나의 시야를 넓혀줬다. 물론 완벽한 표현은 안 되겠으나 더 구체적 표현이 가능해진 셈이다. 숫자로 예를 든다. 전에는 1~5까지 언어로 규정할 수 있었고 1~3까지 표현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1~10까지 규정할 수 있고, 1~8까지 표현할 수 있다. 물론 그 뒤에는 1~1000000까지의 복합적 어떤 것이 있다. 대분류가 늘어 한결 시원하다. 시원함은 모든 인문학, 특히 철학의 존재를 가치를 상징한다.
나의 세계를 규정하는 능력은 여전히 형편없다. 많은 '어떤 것'이 여과된다. 그럼에도 전에 비해 많이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적극적인 표현을 종용한다. 평생, 아니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 해도 숨겨진 1~1000000까지의 '어떤 것'의 표현은 불가능하다. 다만 근접한 곳을 긁어줄 방식을 하나 둘 터득할 수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 내용을 소화 시키며, 길이와 형질이 다른 효자손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