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고

by 루나

작년에 우리 학교로 박준 시인님이 강연을 하러 오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매우 들떴었는데, 이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에 시인이 초청된 것은 매우 특별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강연에 주제가 되는 책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산문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박준 시인님의 산문집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따로 사서 읽어보았다. 이 글을 지금에야 쓰는 이유는, 작년의 나는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고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 속 문장들을 계속 곱씹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내 언어로 소화해 낼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에야 천천히 써 내려가보고자 한다.



책의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라는 글에서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나고 귀에서 죽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는 대목이 있다. 저자와의 만남에서 잘 새겨들었던 박준 시인님의 말씀들도 아직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의 마지막 문장으로, 이 책 속 내 최애 문장 중 하나이다. 나는 박준 시인님만의 담담하고 간결하면서 울림 있는 문체가 너무 좋다. 책의 짧고 간결한 문장들은 각각 하나의 파원이 되어 내 마음속에 수많은 파동들을 만들어낸다. 시인님은 강연에서 글을 쓸 땐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화려한 표현이나 은유가 쓰이지 않더라도 내 경험, 내 이야기를 담백하게 전달하는 글이라면 그 글은 좋은 글이라고 말이다. 박준 시인님의 그러한 생각이 그분의 문체에 그대로 녹아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담백한 문장들은 담담하게 내 마음속으로 걸어와 이토록 출렁이는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시집을 꺼내 읽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축 쳐지는 풍경이에요? 그렇지만 잘 살아가다가 내가 정말 슬프고 우울할 때면, 커튼 뒤에서 슬며시 꺼내 위로받을 수 있는 게 문학이에요. 문학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요. 시집을 휙휙 넘기다가 우연히 만난 하나의 시가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울림을 준다면 그걸로 충분히 시, 문학이 우리의 삶에 주는 가치가 증명된 셈이죠."


박준 시인님의 인상 깊었던 말씀 중 하나이다. 맨 첫 대목에서 그곳에 있던 학생과 선생님들이 모두 빵 터졌다.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시집을 꺼내 읽고 있다니, 그 광경은 정말 살면서 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ㅋㅋ

그런데 1년간 여러 일들을 마주하며, 커튼 뒤에 늘 자리하고 있는 문학이 참 고맙고 든든할 때가 종종 있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고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들고, 지치고, 각자만의 고민이 있다. 그들이 겪는 상실과 슬픔의 크기는 제각기 다르고, 슬픔을 수용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의 크기도 다 다르다. 결국 다 상대적인 것이고, 그렇기에 보통은 남에게 자신의 슬픔을 잘 털어놓지 않게 된다. 그 사람과의 친밀감,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나만 힘든 거 아니고 나만 슬픈 거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슬픔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때 문학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작년에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었을 때도 책은 나에게 큰 울림을 선사해 주었지만, 내가 정말 문학의 위로가 필요하고 힘들 때 책을 휙휙 넘기다 마주한 글귀는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나에게 와닿았다. 이 글의 맨 마지막에 나에게 와닿았던 문장들을 몇 개 끄적여 보도록 하겠다.


중학교 3학년부터 브런치에 작가가 되어 글을 써오면서 내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고민이라면 고민이 하나 있었다. 요즘 부쩍 내 안의 생각이라 하기엔 더 무겁고 신념이라 하기엔 더 가벼운 것들(?)의 모종의 변화가 느껴지면서 이러한 고민이 더 깊어진 것 같다. 나에겐 진지하고 많은 고민을 통해 써 내려간 이야기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겐 상대적으로 나이가 조금 어린 작가의 철없고 덜 성숙한 글로서 전달되진 않을까, 이런 류의 고민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박준 시인님의 말씀들을 마음 속으로 정리하며 내린 나만의 결론은, 설령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저 나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써 내려가면 된다는 것이다. 브런치 작가가 처음 되었을 때의 그 마음과는 다르게 나도 모르게 점점 주변 시선들을 생각하고 신경 쓰게 됐던 것 같다. 그저 내가 현재 나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 되는 것을 말이다. 비록 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 '그늘' 중에서
앞으로도 여전히 나는 후회와 자책으로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후회하고 자책할 일이 모두 동날 때까지. - '어른이 된다는 것' 중에서
이 추상과 아득함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상대가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보다는, '믿음'이라는 나의 감정이 언젠가는 닳고 지쳐 색이 바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서 온다. - '마음의 폐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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