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와 고향 그리움
나에게 세상살이는 타향살이의 연속이었다. 고달픈 타향살이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더욱 떠올리게 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존재했던 장소이고 수많은 추억들이 쌓여 있는 곳이기에, 고향은 애잔한 그리움과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어쩌다 고향에 내려가면 풍경은 변했어도, 어김없이 내 마음을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어려서 가족과 더불어 친구들이 함께 경험했던 그리운 기억들을 아련히 떠오게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했던 아련한 감정과 그리운 추억들이다.
고향이 이토록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들, 익숙하고 편안한 정서적 안정감, 함께 했던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 내 존재의 뿌리인 정체성과 소속감 등이 내 마음속에 깊이 쌓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고향은 추억이 켜켜이 묻어있는 곳이고 그리움의 장소일 것이다.
내 고향은 서해안의 당진시 한진이다. 서해대교에 올라서면 바다 건너 우측에 있는 어촌마을이다. 고향을 대표하는 기억으로는 엄마를 대신했던 작은 고모와 전투기 굉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주 어린 시절, 나는 작은 고모를 유난히 따랐다. 엄마를 대신해서 마음을 의지하고 항상 껌 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고모를 찾아 해안가로 이어진 큰길을 따라 울고불고 소리치며 찾았다. 바닷가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던 고모는, 내 손을 꼭 잡고 해안가를 마냥 걸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고향에는 전투기 굉음이 자주 들렸다. 고향에서 약 10km쯤 떨어진 매향리 사격장에 폭격 연습 때문이다. 나도 저 푸른 하늘을 멋지게 날고 싶었다. 어릴 적에 내 인생의 순수했던 첫 번째 꿈은 전투기 조종사였다. 타향살이를 하면서 그 꿈은 멀어져 갔지만, 전투기 소리만 들어도 어릴 적 꿈이 떠오르곤 한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추억들이 있다. 매년 정월이면 동네가 떠들썩하게 열리는 당제, 4·9일에 열리는 오일장, 왜적을 물리친 영웅바위, 어부들이 그물 일을 하면서 “에이야” “디야” 장단에 맞춰 부르는 노동요가 있다. 먹는 음식으로는 맑게 끓인 준치지리, 기름을 잔뜩 발라 말린 쫄깃한 어란, 고추장을 발라 살짝 구운 뱅어포 등이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추억의 뿌리는 무엇일까? 추억은 고향에서 내가 겪은 것들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사실 문화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비록 나에게는 고유의 추억이겠지만, 오랜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와 역사를 내가 잠시나마 경험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내 기억의 뿌리를 좀 더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고향의 문화와 역사를 함께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한진항의 앞바다는 언제쯤 생겼을까? 불과 400여 년 전 조선시대 초·중기까지는 육지였으나, 갑자기 해일과 홍수가 일어나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홍주(洪州)목 편에는 『一目夜地問에 陸陷爲海』라는 기록을 근거로 전해지는 말이다.
어촌은 예나 지금이나 풍어와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한진항에서 매년 정월에 열리는 당제는, 사고 없이 안전하게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올리는 풍어제다. 높다란 대나무 꼭대기에 갖가지 색동 깃발을 달아 어선마다 꽂았다. 풍어제는 고향사람들의 삶이고 희망을 담은 축제였다. 그런데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당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한진항이 성시를 이루던 시절에는 오일장이 열렸다. 장날이면 조용하던 동네가 온통 시끌벅적하고 활기차게 돌아갔다. 여느 장터처럼 각종 해산물·의류·생활용품·먹거리 등등을 사고팔았다. 어느 장날에는 내가 보릿짚 더미에 불장난을 하다가 그만 불이 크게 번졌다. 도망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나를 안아주셨다.
한진항 서북쪽 바다 한가운데에는 높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아산만에 침입한 왜군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사실은 물안개에 쌓인 이 바위를 보고, 왜군들은 조선 수군들이 매복한 것으로 오인해서 달아났을 것이다. 아무튼 왜군들을 물리쳤으니 ‘영웅바위’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어렸을 적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영바위’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선조 때 한진항이 개항하면서 준치는 고향의 대표 생선이 되었다. 가시가 억셌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맑은 지리로 끓여 밥상에 올려놓으면, 살 속까지 잔가시가 너무 많았다. 잔가시 때문에 어릴 적에는 살점보다 기름기가 떠있는 국물을 주로 떠먹었던 기억이 있다.
한진항에서 준치와 더불어 유명했던 것이 어란이다. 어란은 숭어알을 통째로 말린 것인데, 1970년대 초까지 준치와 함께 일본에 수출했던 품목이다. 제대로 잘 말려서 반지르르한 어란은 쫄깃한 맛이 일품이었다. 어란은 아주 귀한 음식이라서 많이 먹을 수는 없었고, 할아버지가 한 조각 얇게 썰어 주시면 감질나게 맛만 보았다.
고향에는 안전사고로 죽은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혹은 수영을 하다가 안전사고가 났다. 주로 남자들이었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들이었다. 애통하게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선창가에서 굿을 했다. 마을 사람들 틈에 끼어 구경하던 나는, 의식을 치르는 무당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낯설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친구 어머니께서 해주신 굴밥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정월 설 명절이 지나고 친구 집에 들렀는데, 어머님이 따끈한 쌀밥을 손수 지어 내놓으셨다. 무심코 첫 숟가락을 뜨는데 하얀 쌀밥 밑에 양념장을 한 굴이 도탑게 깔려 있었다. 먹다 보니 쌀밥과 굴이 두 세 겹이나 되었다. 정말 귀한 대접을 받은 것 같아 평생토록 가슴 깊이 감동으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어린 나이에 물지게를 지고 다니던 일,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위험한 물속에 뛰어들었던 일, 작은 연못에서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던 일, 미군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며 선창까지 따라가던 일, 한 여름밤 바닷가에서 작은 고모와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일들이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오른다.
중학교 졸업 후부터 고달픈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학교와 직장 때문에 서울·강원·전북·경기남부로 이사를 다녔고, 업무상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몇십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가슴속에 묻혀있던 고향 그리움은 닳아 없어지질 않았고, 오히려 굳은 돌처럼 단단하게 가슴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타향살이를 하면서 내 마음의 안테나는 항상 고향을 향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고향이 저기쯤이려니 생각하며 살았다. 이제는 자동차로 하루면 넉넉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서, 매년 몇 번은 다녀오는데도 불구하고 고향 그리움은 문득문득 되살아난다.
그래서일까? 타향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말투가 고향과 비슷하면 그토록 반가울 수 없다. 말투를 금방 알아차리고, 장난스럽게 “고향이 어~디유?”하고 먼저 물었다. 대개는 당진·서산이라고 답했다. 송악에서 아주 가까운 이웃 신평·합덕인 경우에는 반가움이 훨씬 더했고, “나는 송악 한진유~”라며 웃었다.
테니스 동호회에서 전직 전투기 조종사를 만났을 때도 반가웠다. 어릴 적 고향 하늘에서 본 전투기의 추억이 떠올라 이야기하고 싶었다. 전투기 조종사의 삶이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면서, 이루지 못해 아쉬웠던 내 꿈을 조금이나마 달래 보기도 했다.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에 내 삶은 크게 변했다. 어릴 적 전투기 조종사의 꿈은 잊어버렸고, 새로운 꿈에 도전했다. 학력이 모자라서 검정고시와 대학입학에 도전했고, 평생직장이 IMF 외환위기로 사라져서 경영컨설턴트에 도전했다. 이러한 도전을 통해 새로운 꿈을 이루었고, 오늘날까지 경영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 과정에는 고향과 관련된 작은 추억도 있다.
오래전에 고향 ‘○○○ 쌀’ TV-CF 자문을 한 적이 있다.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강의 휴식시간에 우연히 고향 부군수를 만났다. 얼마 후에 TV-CF 프레젠테이션 때 자문위원으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향 일인지라 흔쾌히 수락했다.
당일 프레젠테이션에 배석했다. 광고대행사 세 곳이 차례로 발표했고, 이어서 광고대행사를 선정하기 위한 자체 논의가 진행되었다. “쌀은 도정한 지 15일 이내에 밥을 지어야 맛이 최고로 좋다.”는 것을 광고 콘셉트로 잡은 B광고대행사를 선정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부군수는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논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나는, 쌀 관리 시스템을 짚었다. 도정한 지 15일이 경과한 쌀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이에 대한 계획을 물었다. 관계자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답변을 했다. 이에, B광고 집행의 위험성과 고객과 관계관리에 대해서 조언을 했다. 내 고향에 유익한 조언을 해서 마음 뿌듯했고, 돌아오는 발걸음 또한 그리 가벼울 수가 없었다.
∥2022.05.31.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고, 내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저서 3종을 각각 13권씩, 총 39권을 ◯◯시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책들에는 경영지도사로서 경영 컨설팅을 수행한 수많은 경험들이 정리되어 있다. 20여 년간 경영컨설턴트로 살아온 내 삶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담긴 책들이다.
내 저서는 경영·마케팅 관련 전문서적이므로, 고향의 중소기업들이 경영·마케팅 역량을 높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인문서적이 아니라서, 널리 읽히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기증하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내 고향은 이미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작은 고모는 멀리 시집을 갔고, 할머니 또한 영원한 이별을 했다. 어릴 적 친구들도 대부분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했다. 하늘에서 요란하게 울리던 전투기 굉음도 사라졌다. 오일장도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고향의 대표 생산물인 준치·어란·뱅어포는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고향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다. 반 이상이 외지인이라고 한다. 그들 또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으니, 고향을 방문해도 이방인인 듯 이리저리 거리를 서성거린다.
그렇다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변한 것은 아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라서, 언제나 그리움이고 편안한 안식처다. 고향을 떠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어도, 애틋한 마음은 여전히 어릴 적 그대로다. 익숙한 모습들이 사라지고 아무리 낯설어도 내 마음속 고향은 해안가와 더불어 옛날 그대로다.
서산에 해가 기울어가니 날개를 접고 편히 쉴 곳을 찾는다. 크고 작은 꿈을 이루며 살아온 타향살이를 내려놓고 있다. 친구들은 오랜 타향살이를 뒤로하고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간다. 나는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듯, 삶을 뒤적거리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