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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는 허물을 벗는 일

7월 넷째주

by Y percent

#1.

최근 두 번의 이사를 연속으로 하게 되었다. 하나는 본가의 이사, 다른 하나는 자취방의 이사. 밭은 간격의 이사 두 번은.. 노동에 가깝다. 짐을 풀었다가 쌌다가 다시 풀었다가 옮겼다가 다시 쌌다가. 아직 풀지 못한 보따리가 쌓여있는데 보따리 하나를 더 들고와야만 하는 마음이란. 발 디딜틈 없는 방바닥을 보면 한숨이 푹 내쉬어지고야 만다.


하지만 세상만사 그렇듯 어떻게 또 안 좋은 면만 있겠는가. 흙에 공기를 넣어주려면 한 차례 밭갈이가 필요하듯 빛바랜 물건들이 제 쓰임을 다시 찾기 위해서도 방갈이가 필요하다.



#2.

포장이사는 짐을 싸는 과정이 딱히 없다. 단지 책장 깊숙이 들어있던 편지라던가 침대 아래로 언제 굴러 들어갔는지 모를 줄 이어폰 같은 것들이 하나씩 발견될 뿐. 그래서 분명 한 방안에 들어가있던 짐들이 이사 온 집에서는 두 배가 되어있는 마법이 발생한다. '이것들이 대체 다 어떻게, 어디 들어가있었단 말이야.'


도무지 풀 엄두가 나지 않는 옷 봉다리들은 잠시 옷장에 그대로 두고 창고에 들어 있었던 박스들을 꺼내본다. 아주 아기였을 때의 사진, 부모님의 결혼 사진, 초등학교 졸업 사진 위로 먼지가 가득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더 중요한 것을 둘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이 액자들은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가겠지만 일단은 꺼내어 전시해둔다. 피아노 위, 스툴 위, 책장 안으로. 이런게 바로 이삿날의 특권 아니겠는가.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이런 배치같은 것. 추억보다 중요한 실용성이라는 가치가 집 안을 뒤덮기 전에.


결혼 앨범 속 부모님은 눈부시게 젊다. 그 시대의 화장법을 그대로 옮겨놓은 어머니의 한껏 솟은 눈꼬리와 눈썹산, 지금의 반 정도 되는 풍채의 아버지. 분명 나이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데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왜 지금은 없는 젊음이 보이는지. 그 때 그 시절부터 소중히 간직해왔을 고물이라기보다는 보물에 가까운 물건들이 어디선가 튀어나온다.


몇 번의 이사 속에서도 살아남은 잡동사니들. 오빠와 함께 찰흙을 빚어 만든 여우라던가 초등학생 때는 그리도 신기하던 돌아가는 지우개 꼬다리. 이또한 언제가는 버려질 자투리 모음이지만 일단 이번 이사까지는 봐주도록 한다. 다음에는 진짜 버려야지. 그치만 추억이 묻어있는걸.. 이런식으로 생각하면 정말 끝이 없어지는 것이다.



#3.

스스로 짐을 싸야 하는 경우, 그 고민은 두 배가 된다. 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갈지 아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혼자 사는데도 뭐 이렇게 세간살이가 불어나는지. 분명 휑했던 집이 하나 둘 취향으로 채워져갈 때 만족감과 함께 나중에 방 뺄 때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숨어있다.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두 개 정도 펼쳐놓고 일단은 누가 봐도 버릴 것부터 채워나간다. 부러진 펜, 너무 헤진 옷이라던가 더는 쓰지 않을 것 같은 가구. 구매했을 때의 설렘이 생각나지만 뒤로 남겨놓아야 할 것은 남겨놓아야 한다.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가 가구를 쓰고 싶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럭-키다.


가져갈 것을 차에 옮겨놓고, 버릴 것을 모아놓으니 반투명한 쓰레기봉투가 마치 벗어둔 허물같다. 그간의 시간동안 나의 세월이 묻어있는 집의 흔적. 이제 더 큰 도약을 위해 남겨두고 떠나지만 함께한 추억만은 진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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