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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 맞는 사람이란 뭘까

7월 셋째주

by Y percent

#1.

학교를 졸업하고 깨달은 것은,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멀어진다는 것. 학교에서야 저 사람이 나랑 맞던 안 맞던 같은 수업을 들으며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되기 때문에 누군가와 멀어지기 쉽지 않다. 아예 뭐 손절이라는 그 중대차한 행위를 하면 모를까. 그 정도의 극단적인 맞지 않음이 아닌 다음에야 친구라고 부를만한 성질의 인간관계가 아주 방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 인간 관계는 두 번의 채에 걸러진다. 고등학교 졸업 때에는 대개 재수를 하는 쪽과 안 하는 쪽이라던가 진학한 대학교의 위치와 같은 정말 물리적인 이유로 멀어졌던 것 같다. 이전처럼 매일 볼 수는 없고, 아무래도 상황이 많이 다르니 시간을 내어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 시간이 잘 맞지 않았던 쪽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방점이 다른 곳에 찍힌다. 시간을 내어 저 '사람'을 만날 수 있는가. 정확히는, 만날 중요도가 있는가? 각자의 사회생활을 하느라 시간은 더욱 소중해지고, 누군가를 만나느라 할애할 수 있는 짬은 한정되어 있다. 그렇게 그 정도의 소중함을 가지는 몇몇의 사람들이 연락하는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채 곁에 남는다.



#2.

어른이 되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긴다고들 한다. 사람을 보는 눈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 사람이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일지 아닐지 정도는 보는 눈이 생기는 것 같다. 그것은 위에 서술했던 그 두 번의 거름망에서 남아있는 한 줌의 인간관계 간의 공통점을 통해 정립된 일종의 귀납적 추론이다. 타의적인 첫번째보다야 자의적인 두번째가 더 도움이 많이 되기는 한다.


그러다보니 최대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던 몇 년 전과는 달리 '어차피 이 사람과는 오래 연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 연락을 이어나가기가 조금 망설여지는 것이다. 어차피 일회성 만남일 것이라면 귀하디 귀한 오프를 이렇게 날려버려도 되는 것일까. 어차피 이 사람은 나와 같은 결의 사람이 아닌데.



#3.

하지만 이 나와-같은-결 알고리즘이 가져오는 문제는 대충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만 주위에 남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편하기야 편하다만 뭔가 이래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온라인 알고리즘에 이어 오프라인 알고리즘까지 고여버리면 새로운 생각, 새로운 시각은 대체 어디서 접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결이 맞는 사람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귀납적 추론이라고 했다. 그럼 그 비과학적인 '감'이라는 것 말고 몇 가지 특징으로 서술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와 같은 정치 성향? 음, 어느 정도 맞을 수는 있겠으나 사람을 만날 때 정치 이야기를 그다지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면 근래 몇년 간 핫했던 나와 같은 MBTI는 어떤가. 결이 맞는 인물들을 생각했을 때 MBTI가 일치하는 이들보다 일치하지 않는 이들이 더 많다. 일단은 패스. 음, 같은 직업군?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 남아있는 이들을 보면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통계의 오류가 아닐까. 노출되는 집단이 같은 직업군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남아있는 사람도 그럴 수 밖에.


공통점을 찾은 것 같다가도 예외가 꼭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결이 맞는 사람이라는 건 없는걸까. 어떠한 기준 없이 만나다 보니 각별해져버린걸까. 하지만 정과 끌림이란건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인데. 나와 맞지 않는 결임에도 너무나 오래 봐온 나머지 정이 들어 결이 맞아져 버린 사람과 오늘 처음 봤음에도 끌리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전자라고 후자보다 편안하지 않으랴.


사람을 만나는 시간에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삶이라는 건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하다. 또 모르지. 나와 맞지 않는 결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던 많은 시간들이 어쩌면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될 기회를 앗아간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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