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생존은 말한 이에게 달려있지 않다. 일단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힘없이 죽기도 하고, 더 강렬하게 살기도 하고, 살아있다 죽었다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냥, 던진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딴에는 날 위한다는 말이라며 꺼낸 말이었지만 듣기 싫다고 막았어야 했다. 그 이야기가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화가 난다. 그 거지 같은 말을 끝까지 듣지 말았어야 했다.
살면서 수많은 말을 듣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들을 말이 점점 사라지는 걸 느낀다. 분명, 교육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문맹률이 높지 않음에도 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다들 아무 말을 뱉느라 바쁜 세상이다.
말실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말실수가 잦아지고 있다. 나도, 언제 어딘가에서 말실수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 난 생각한다, 말실수란 애초에 있을 수 없다고. 그 말이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무심결에 나오는 것이지. 없던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말실수란 없다.
말이 가진 매력은 어마어마하다. 사람들이 화려한 언변에 휘둘리는 것 같지만, 사실 아니다. 대중들은 말의 유려함에 현혹되는 것이 아닌, 말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에 흔들린다. 외모보다 더 큰 매력을 뽐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말’이다. 말에서 전달되는 감정에 마음을 주는 것이다.
말에 이성과 감정을 동시에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내가 지금껏 보아온 사람 중 이에 가장 능했던 사람은 노회찬 의원이었다고 본다. 굉장히 이성적인 이야기를 감성적이게 풀어내고, 딱딱한 이야기에 위트를 더하고... 말에 있어선 그가 가진 매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그 말들에 한층 매력이 더해진 건 아마 그의 행동도 말과 같은 방향을 향했기 때문이다.
한때 노회찬 다음으로 좋아했던 논객이 있었다. 진중권. 그가 썼던 책을 재밌게 읽기도 했고, 방송에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그가 멋지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근 몇 년 사이, 변해버린 그의 말들과 행보들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가 뱉어내는 말이 연일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소위 “따옴표”저널리즘에 진중권이 매번 이용되고 있는 것. 관계자도 아닌 그가 모든 뉴스에 매번 언급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허나 이해는 간다. 진보 논객으로 유명한 그가 뱉어내는 헛소리급 독설이 언론에서 받아먹기 얼마나 좋을 것이냐.
신년 토론 때 보여준 말들과 신천지 관련해서 기본적 취재도 안 한 채 뱉어낸 말들, 기자 1명과 통화해보고 그 통화 자체가 하나뿐인 팩트 인양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사실, 그에 대한 경멸보다 속상함이 컸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가. 자신이 뱉은 말이 곧 자신의 격이 될 것인데... 아무리 내가 속상한 들. 그는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 더 이상 눈길 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의 말은 더 이상 나에게 생명력이 없다.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말들이 있었다. 사실, 그 말들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입을 떠난 말을 살리고 죽이는 건, 듣는 이에게 달린 일이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그냥, 지나갔으면 사라졌을 것들에게 굳이 굳이 심폐소생을 했던 것이다. 분명 좋은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아왔음에도 어쩜 그리 나를 아프게 한 말들만 선명하게 살려냈는지.
이제, 그런 말들이 사라질 수 있게 해야 할 것 같다. 결국 그 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
오늘도 난 수많은 말을 듣고, 그보단 적은 말을 하며 지나게 될 것이다. 많은 말을 하며 살진 않겠지만, 적어도 생명력을 가진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도 선한 생명력을 가진. 언젠가 나의 말들이 좋은 결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