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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Sep 03. 2020

두 번째, A

나를 들켰다

작가님은 본인걸 하고 싶은 거군요.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쏟아진 눈물에 내가 더 당황해 버렸다.




그는 한사코 방송에 나오지 않겠다고 거절하셨던 교수님이었다. 처음 섭외를 요청했을 때, 그의 목소리엔 자신의 번호를 어찌 알게 되었는지 조금의 경계가 묻어나고 있었다. 사실, 방송을 제작하는 입장에서 그분 외에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수’라는 직함은 많고, 방송에서 원하는 ‘말’을 해줄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통화를 하며 확신이 들었다.      


이분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A교수의 말과 A교수가 전하는 메시지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거절로 인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고, 긴 회의를 마쳤다. 돌아오는 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난 고민 끝에 장문의 메일을 그에게 보냈다.      


하루가 지나 그에게 연락이 왔다.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당시의 나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 있던 상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왜?    

 

난 고작 한 글자짜리 질문에 답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이 피곤한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다만,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난 매일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인터뷰에 응하고, 촬영 팀이 갔을 때, 그는 인터뷰를 나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고 한다. 당시 촬영 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 이야기는 누구나 하곤 하니까. 다들 그렇게 사회생활 하곤 하니까. 그런데 인터뷰 확인을 위해 영상을 재생시켰다가 난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영상 말미에 그는 나와 통화했던 그 진심 어린 단호한 말투로 여러 번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김 작가님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날, 검게 물든 컴퓨터 화면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 방송 날짜가 잡혔다. 방영을 앞두고 날짜를 전달드리기 위해 보낸 메일에 방송을 마치고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전화가 아닌 직접 얼굴을 보고 인사를 드릴 기회가 생겼다. 방송은 무사히 끝났지만 생채기로 가득한 나의 너덜너덜한 마음은 전문가인 그에겐 너무 쉽게 읽혔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둔 첫 만남. 담담하게 이어간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는 말했다.     


작가님은 본인걸 하고 싶은 거군요.    
  


200만 원의 빚 때문에 시작했던 일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방송생활이었지만 솔직히 재미있었다. 방송작가란 직업이 비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주는 소속감도 있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3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홍보팀, CG팀, 미술팀, 차량 선생님들까지 알고 지냈다. 회사에서 4년을 근무했던 조연출이 놀랄 정도였으니까. 티키타카가 가능한 공동작업도 즐거웠다. “너처럼 일 빠르게 배우는 애는 처음이다.”, “벌써 입봉 했다고?” 이런 말들에 조금은 우쭐해하며, 즐겁게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계단을 3~4칸씩 빠르게 올라가고 있어도. 어느 순간 밀려오는 감정들이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그 감정들은 쌓이고 쌓여갔고,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마음을 외면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나서야 그간 방치된 상처들이 작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외면했던 내 마음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에 당황했던 그때, 그도 담담하게 그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외부 상황과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마음을 잡았는지... 결이 다른 이야기였지만 난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읽어냈고, 나의 미래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난, 두려웠다. 내가 원하던 곳을 향해서 가는 길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내 것을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을 담보로 한 것일 수도 있기에. 만약, 실패하면 어쩌지? 지금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생이지만 먼 훗날 내 선택을 후회하면 어쩌지? 난, 시작도 하기 전에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있을지도 모를 ‘나의 후회’를 겁내고 있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에게는 처음이라 난, 서툴다.      


어쩌면 우린 결국 눈감을 때까지 서툰 시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서툰 사람들.     


모두 완성을 꿈꾸지만, 우리가 원하는 완성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서툴고 서툴게 내 길을 가는 것. 그뿐인지도 모른다.      




그와 대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내가 바라던 꿈이 이뤄졌냐고? 그건 아니다. 여전히 미래는 불안하고, 현재는 완벽하지 않으며, 난 아직도 서툴다. 그래도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난 지금 나의 길을 걷고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그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을 받았다. 간단한 안부와 근황들. 서로 긴 문장이 오간 것은 아니지만 몇 줄의 문장 속에서 난 한 번 더 그의 응원을 받았다.     

 

앞으로 가는 길이 순탄하길 바라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뭐 하나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있었어야 말이지. 하지만 내가 지금 걷는 길을 어딘가에서 응원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좋은 소식이 생겼을 때, 전하고 싶은 이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난 내일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 소식을 전하고 싶은 이가 있기에.


그렇게,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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