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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Sep 11. 2020

네 번째, A

 지각, 소문 그리고 제안

 

난, 동그라미는 싫지만, 얘 글은 좋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문득, 단상에 서있는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난 지각쟁이다. 아, 비밀이었는데 만천하에 공개를 하게 되는군. 유명한 일화라지? 논술시험 5분 지각으로 인해 대학 입학 지원 서류가 탈락한... 아... 이 한 문장을 쓰면서도 입안이 쓰다. 오늘은 그 이야기까지 가기엔 너무 멀기에 우선, 자타공인 지각쟁이라고만 해두고 다음으로.       


대학교 3학년, 갑작스럽게 늘어난 통학시간으로 난 장작 2시간가량 버스를 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내가 타야 했던 그 버스는 텀이 참 길었다. 내가 분명 일찍 나왔는데 버스가 안 왔다.. 라던지, 내 앞에서 바로 버스를 놓쳤다.. 라던지 이런 이유가 매일매일 생겼다. "더 일찍 나오면 되잖아!"라는 말엔 할 말이 없지만,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냔 말이다. 내 인생은 마의 5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침마다 어떻게든 그 5분을 메꿰보려 운동선수마냥 전속력으로 달리는 나를 보며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원인을 분석하지 않은 채 대책 마련을 위해 난 매일 아침 국대 선수들처럼 달렸다


대체, 왜 그랬던 것이냐 동그라미.  

 



난 어딜 가나 이름이 불리곤 하는 아이였다. 남다른 이름 때문인 까닭도 있지만, 고등학교 때 친구는 말했다.


“넌 좀 눈에 띄는 애지. 난 1학년 때부터 너 알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외모 아님, 체크.  

키가 크지 않음, 체크

패션이 튀지 않음, 체크

문제아 아님, 체크     


엄마는 말했다.

네가 등치가 커서 그래


지각하는 애들 3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매번 내 이름이 불렸다. “동그라미, 또 너냐?” 지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수업에서도 유난히 내 이름이 많이 불렸다. 정말, 엄마 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A 교수는 내가 10번을 지각했던 수업의 담당교수였다.


대학교 한 학기 수업이라고 해봐야 한 과목당 16주 정도 진행이 되는데, 이중 10번을 지각했으면 말 다한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매주 지각을 하는 내 이름을 거론하며 수업 대신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하기도 했었다. 지각을 했던 주제에 '나만 지각한 것도 아닌데...' 하며 억울하단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10번 지각이라니... 난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학생이긴 했다.




첫 수업 OT에서 A 교수는 이번 학기엔 조금 실험적인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20명 남짓한 학생들이 듣는 수업은 발표로 진행될 예정이었고 OT 이후, 팀 or 개인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난 학기 조별 수업으로 제대로 힘들었던 나는 고민 없이 개인 발표를 선택했다.      


초기 몇 주간 개념을 정리 한 이후, 드디어 시작한 발표. 첫 팀의 발표가 끝나자 A 교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생각한 방향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1조의 발표를 두고 한 시간가량을 피드백 한 교수는 프로젝트의 방향을 바꿔 다음 주에 다시 1조가 발표를 하라며 2조의 발표를 보류했다.


그 교실의 누구도, 1조가 한 달간 발표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실험적인 수업을 하고 싶었던 것도 이해는 하지만, '이 산이다!!!' 하고 올랐다가 '어, 여기 아니네, 저 산이다!!!' 하는 것을 한 달간 지속하다 보니 학생들은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초기 발표자인 학생들과 A 교수는 교외 활동을 함께 하고 있어 누가 봐도 그들끼리의 친밀감이 형성된 상태였다. 그들끼리는 재밌었는지 몰라도 다른 학생들의 불만은 조금씩 쌓여갔고, 나와 수업을 함께 듣던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나의 10번째 지각이 있던 날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살금살금 들어갔는데,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교실 분위기. 뒷자린 모두 차있는 상태. 어쩔 수없이 앞자리로 향해 엉덩이를 붙이려는 순간, A교수는 말했다.      


너희가 내 욕을 하고 다닌다며?


이게 무슨 소린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A교수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내 후배들을 보며 우리들이 자신을 욕하는 걸 알고 있다며 격양된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 수업이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고 외쳤는데... 맨 뒷자리에 이름 모를 학생 하나가 벌떡 일어나 교실을 떠났다.      


한 시간 동안 우리를 향해 감정을 쏟아내는 그녀를 보며 나와 나의 후배들 모두 사색이 되어갔다. 가뜩이나 지각으로 밉보인 상태에서..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한참 날카로운 말을 쏟아낸 그녀가 드디어 할 말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다음 발표 누구야, 나와!      


다음 발표자는 나였다.




내가 어떻게 발표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PPT를 띄운 채, 무슨 말을 하긴 했는데, 그 발표는 기억에 없다. 나의 시놉시스 발표가 끝나고 나니 교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나의 유인물을 훽훽 넘기며 다시 보던 그녀는 말했다.      


난, 동그라미는 싫지만, 얘 글은 좋네




수업을 마치고 그녀에게 찾아간 나와 후배들. 칠판을 지우며 그녀는 말했다. 누가 그 이야기를 전했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고. 누군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교수님. 누가 이야기했는지
그건 궁금하지 않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이야기를 들으셨다는 것만으로도
저희가 잘못한 겁니다.
죄송합니다


A 교수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사실과 어느 정도의 뻥튀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뻔했다. 그 자리에서 진실 여부를 가리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란 단어를 통해 그녀가 들은 것이 다 진실은 아님을 강조하고, ‘들었다는 것’ 자체로 사과를 전했다. A교수는 말을 끝낸 나를 한동안 빤히 보다가 다른 학생들과 점심을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겠냐고 물으셨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금 당황했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너무도 불편하게 A 교수의 애제자들 사이에 끼어 나와 후배들은 커피까지 마셨고, 난 다음 수업을 핑계로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A교수였다.      


내일, 내 지인들이랑 저녁을 먹을 건데
너도 생각 있으면 나와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름에 놀라기도 했고,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너한테 선택권이 어디 있냐고 무조건 가야 한다고 말하며 “제발 그날은 늦지 말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난 그날 15분을 늦게 도착했다. 매번 수업에 늦었던 애가 그 자리에 시간 맞춰 가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A 교수는 지인들에게 날 소개했다.      


내가 말했지? 내 욕하고 다닌 애


돌아서기엔 너무 늦었었다.           




그날 모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간 수업에서 이야기로만 듣던 일러스트레이터, 영화 제작 PD, 배우들이 모인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날 보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얘가 글을 하나 썼는데
그 얘기가 꽤 재밌더라고.
너, 내가 팔아 줄 테니 그거 한번 써봐



난 그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어느 날 또 갑자기 전화를 해서 독립영화를 촬영할 예정인데, 주요 스텝이 정해진 상태고 작가를 내가 맡았으면 좋겠다며 소재 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녀와의 전화를 끊고 나는 휴학을 했다.          




단 한 번도 전업 작가를 꿈꾼 적은 없었다. 한, 40 정도 되면 내 책 한 권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뿐. 주변 이들은 나에게 A 교수는 기회라고 했지만, 사실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누군가에게 빚지는 것이 죽도록 싫은 나에겐 그녀의 제안은 언젠가 갚아야 할 빚처럼 느껴졌다. 제안은 감사했지만 난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고, 그때 나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헌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난 대학을 졸업한 이후,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있다.




돌아보면 그녀는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고, 자존감도 대단했다. 그리고 참 솔직하고 쿨한 사람이었다. ‘난 너는 싫지만, 니 글은 좋아’라는 말을 면전에 대고 말하는 사람이었으니... 결국 그녀의 손을 잡진 않았지만, 그녀가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날의 그 사건과 그녀가 팔아주겠다던 그 이야기가 나의 10년이 넘은 조금 지긋지긋한 여정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물었다. 왜 그 이후에도 그 이야기를 쓰지 않냐고. 왜 였을까?


자그마치 10년. 얼떨결에 작가의 길을 걸어왔지만, 난 수없이 이 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었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머뭇거렸다. 사실, 글 쓰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 기쁨만은 아니었기에. 나에게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전업작가를 시작하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자그마치 10년. 그렇게 도망 다녔는데 결국 향한 길이 전업작가의 길이라니. 이 또한 아이러니.

 

얼마 전, 그 이야기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10년이 지난 이야기였지만, 지금 봐도 재미있는 이야기긴 했다. 긴 고민 끝에  이야기를 재구성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완성할 수 있을까? 아니, 완성해야 한다. 이야기에 묻은 뽀얀 먼지들을 털어내고, 2020년에 새롭게 써 내려갈 그 글이 마침표를 찍는 날. 왠지 그녀가 잠깐 정도는 생각 날 것 같다.


먼 훗날, 언젠가 한 번쯤은 그녀를 만날 일이 있을 것만 같다. 그녀를 만나면 우린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왠지, 그녀는 그때도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할 것 같다.


내가 말했지? 내 욕하고 다닌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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