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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Apr 14. 2018

푸르른 봄

 2011년 4월 20일, 학교를 그만뒀다. 이제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도, 교복을 입을 필요도, 머리칼을 자를 필요도 없다. 사복을 입고 밖에 나와 주적주적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방황하다가 근처 도서관에 갔다. 주섬주섬 책을 꺼내놓고 멍하게 바라봤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중퇴생에게 주어진 일은 무엇일까. 나의 좌표는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답을 내려줄 수 없다는 사실에, 지극히 외로워진다. 


 강박증이 생겼다. 1분 단위로 가방의 소지품을 확인한다. 불안하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다. 뭔가를... 자꾸 뭔가를 모르겠다. 숨이 가빠서 밖에 나와 걷는다. 벤치에 앉는다. 풀 내음이 난다. 바람이 분다. 푸르른 봄이다. 나는 숨이 가쁘다. 턱밑까지 물이 차오른 것 같다. 가파르게 호흡하며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학교 가는 게 싫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억압적인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교복을 입는 것도, 두발 단속도, 체벌도, 동급생과 친한 척하는 것도 싫었다. 내가 선택한 건 아무것도 없다. 주어졌을 뿐이다. 중학교 3년은 인생 최악의 시간이었다. 자유의지를 상실한 식물인간 같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성적에 대한 부담감도 커졌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니 성적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노역을 하는데 능률이 오를 리 없다. 그렇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시키면 해야 한다는 게 주어진 윤리였다. 결석은커녕 지각조차 한 적이 없고, 학원도 바쁘게 다녔고, 우연히 같은 반에 배정된 아이들과 ‘친구’라는 가식적인 이름표를 달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되는데, 늘 그랬던 것처럼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면 되는데, 자퇴가 선택지에 들어왔다. 갑자기 스쳐 지나갔다. 돌아보면 그 시기의 나는 폭발 직전이었다.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이 한꺼번에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지에 자퇴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선택지가 생겼으니 선택해야 했다. 


 그만두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자퇴라는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곧바로 결정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간단한 사실이다.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안 그래도 요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요.” 평소 내게 관심이 있던 것처럼 위하는 말을 보태줬다. 사물함에서 짐을 꺼내 나왔다.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TV 프로그램에 기인(奇人)으로 출연한 것 같았다. 짧게 답을 하고 끊었다. 번호를 지웠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건 삭제하기로 했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일반적인 코스는 사라졌다. 백지상태가 됐다. 반면교사도 조언자도 없다. 혼자다. 내 삶을 만들어야 했다. 주체적으로 자기 길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근사한 문구가 아니라 소름 끼치는 현실의 문제였다. 17살에게 현실은 무엇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에 물이 차는 것 같았다. 숨을 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떤 구상도 없이 부스러기를 쌓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모았다. 불안하고 초조한 한편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평생 학교와 집을 오가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있었다. 하루하루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스러기의 형태가 드러났다. 선택의 결과가 축적되며 형성된 정체성이었다.


 학교를 그만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선택이다. 나는 스스로 경계를 그어본 적이 없는 유령이었다. ‘나’라고 규정된 사람의 그림자를 배회하고 살았다. 사람은 선택하고 불확실성을 감당할 때 실체를 가진 독립적 개인이 된다. 17살 때의 선택으로 얻은 교훈이 있다.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는 것이다. 삶의 경계는 부모님, 선생님이 아니라 내가 긋는 것이다.

 제도권에서 이탈한 대가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으면 자유로움보단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우주 미아가 되는 기분이다. 고등학교 중퇴자 신분으로 4년간 철저하게 고립돼서 지냈다. 환멸과 우울이 성격의 일부가 됐다. 정신이 병들었다. 10대 후반기를 건강하지 않게 보낸 탓이다. 그 나이에 혼자 오래 있으면 정신이 병들게 된다. 


 후유증이 남았지만 한 번도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학생이라는 프로필보다 고등학교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프로필이 더 자랑스럽고 소중하다. 내가 최초로 내린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하면 결과가 어떠하든 후회하지 않는다. 내 선택에 기초해서 세계관을 정립했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느낀다. 고유한 경험을 얻었으니 나머지는 기쁜 마음으로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삶은 무수한 선택의 집합이다. 선택의 결과로 삶이 구성된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존적인 선택의 순간에서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타인에게 공감을 구걸할 것도 없다.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선택이라면 말이다. 그 순간 당신의 봄, 푸르른 봄(靑春)이 시작된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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