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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Apr 14. 2018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법

두 번째 이야기


3.

 우리는 주로 ‘행복’을 위해 자존감을 이야기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의 비교적 높은 행복도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열등한 사람과 우수한 사람을 가르는 잣대가 필요 없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자존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다. 그 과정에서 내 모습은 완벽하지 않다. 부족한 점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다. 자존감을 통해 우리는 그런 점들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자신의 미운 부분을 존중하면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넓혀간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타인에게까지 커지는 거다.


 타인을 존중하기에 나를 존중한다. 나를 존중하기에 타인을 존중한다. 타인을 바라보는 방법과 나를 바라보는 방법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필자는 자존감의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 있다고 본다.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우리는 흔히 자존감이라고 하면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나’를 존중하는 태도. ‘나’를 사랑하는 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마음. 하지만 ‘나’에게만 초점을 맞춘 자존감에 대한 위의 사전적 정의는 어설프다. 자존감은 타인과 얽매여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의견 또한 가볍게 받아들이는 여유. 따라서 우리는 자존감을 위해 외부세계를 향한 배타적인 시선이 아닌, 외부의 영향을 수용할 수 있는 틈을 알아가야 한다.


자존감을 통해 우리는 나만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인지한다.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인과 조화시키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의 밑바탕이다.


 p.s. 자존감이 쉽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포장되지만, 그 끝에는 사람과 사회를 향한 배려가 있다는 걸 잊어서 안 된다. 자존감의 척도에는 나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자존감이 고민이라면, 본인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민해보는 것도 좋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존감과 관련되어서 ‘타인의 말을 신경 쓰지 마라’는 조언이 있다. 하지만 타인의 말을 신경 쓴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경청한다는 거고, 영향받으며 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일종의 배려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다. 이는 오히려 자존감과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을까.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위 같은 조언들이 ‘배려’를 쉽게 ‘눈치’로 폄하한다는 생각이 든다. 배려를 눈치의 범주로 집어넣으며,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심리를 정당화시키는 담론이 된다. 하지만 무엇이 눈치이고, 무엇이 배려인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기준은 행동 주체의 마음에서 시작한다. 타인이 두려워서 행한 행동이라면 눈치이지만, 타인을 아끼는 마음에서 행한 행동이라면 배려이다. 눈치인지 배려인지는 오로지 그 행동의 주인만이 알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조언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또는 모습)으로 그 둘을 구분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마음으로 주변을 챙기는 사람들에게 쉽게 눈치라는 딱지를 얹고, ‘나의 배려가 눈치는 아닐까?’라는 망설임을 개인에게 심어준다.


 또한, 그 타인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처럼 무시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영향받는 게 모두 부정적인 걸까? 우리의 연약함을 뜻하는 걸까? 아니다. 필연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타인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면, 왜라는 그 이유가 더 중요하다. 외부로부터 온 변화를 살피고, 이를 수용할지의 여부가 내게 달려있는 게 더 적절한 조언이 아닐까 싶다. 자존감에 대한 정교한 언어가 다시 필요하다.


 우리가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스스로 폄하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자신감이 강요되면서 배려라는 여린 마음이 낮춰 평가된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런 마음을 응원해주어야 한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조심하면서 사회는 올바르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혹 주변에 귀 기울이며 본인의 생각을 알아가는 느린 친구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라는 조언보다 ‘사람마다 자신을 찾아가는 속도와 방법은 다르니 괜찮다’고 위로해주길 바란다. 따뜻한 마음 잃지 않도록 격려해주길 바란다. 



4.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소개서의 필수 질문이다. 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을까. 아마 나 자신을 고정해 안정적인 모습을 찾고 싶었던 거 같다.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지, 내가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한참 고민에 빠져있던 적이 있다.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기. 내가 찾은 답이다. 


 시간마다 변하고 타인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나의 모습을 즐기기로 했다.


 몇몇 사람에게서는 일상의 가벼운 소재들을 웃으며 주고받지만, 몇몇 사람에게는 나를 무겁게 하는 주제에 대해서 털어놓는다. 이런 변덕은 - 때때로 달라지는 대화의 소재와 내 모습- 상대방과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거다. 변하는 게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내 진정한 모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변하는 나의 정체성보다 상황마다 적절하게 표출되는 나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고정되지 않은 나의 정체성에 다양해진다. 가벼워진다.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할 필요 없이, 각각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나의 이미지를 가볍게 받아들인다.


 나 자신을 특정 정체성(이미지)에 가두지 않는다. 나의 자아상에 자유를 두는 거다. 이제 바람직한 이미지를 추구하기보다, 상황마다 달라지는 나의 모습을 관찰하고는 한다. 그러다 새로운 사람 앞에서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때면 즐겁다. 내가 또 다른 나일 수 있도록 해주는 각각의 인연들이 소중하다. 필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자유를 여기서 찾았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의 ‘존재’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닫고 더욱 이를 실감했다. 나 자신의 이미지가 두려웠던 거다. 그래서 타인에게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나를 꽁꽁 둘러맨 자의식에서 나와야 했다. 어쩌면 자존감이 낮은 이유는 자기 자신을 아껴서 일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은 욕심이 근원이고, 본인에게 애정이 있기에 그런 노력도 가능하다. 나는 자존감을 위해 본인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해보고 싶다. 타 세계를 헤아리는 마음을 가져보라고 전해주고 싶다.


p.s. 

'우리 자아는 포착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흐릿한, 단순한 한 외양인 반면, 너무나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다.'   
                                                                                                                      - <불멸>, 밀란 쿤데라

 실제로 나의 자아를 정의하려는 시도. 특정 언어로 설명하려는 노력은 ‘자아’를 겉핥는 것 아닐까 싶다. 획일화시키지 않고, 다양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자아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길이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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