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사람 넷과 함께 개 한마리가 산다.
우리집에는 사람 넷과 함께 개 한마리가 산다. 강아지를 키운다고 하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내 카톡 프로필 사진인 강아지의 귀여움을 칭찬하며, 본인도 개를 키우고 싶은데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하소연한다. 딱히 본인이 개를 키우고 싶은 건 아니어도 부러운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나는 갑자기 우리집 똥강아지의 넘치는 잘생김과 귀여움과 잔망스러움과 사랑스러움과 톡톡 튀는 멍청함, 그 모든 것들을 내놓고 자랑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여 핸드폰 갤러리를 뒤진다. 사진첩 반절 정도는 강아지 사진이다. 사진을 감상한 누군가가 귀엽다, 아니면 '귀엽다'와 비슷한 말이라도 하면 뿌듯하다. 그 뒤로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강아지 자랑을 하기 시작한다.
"보물찾기 놀이를 가장 좋아해. 어디에 숨겨놓든 삼십초도 안 돼서 찾는다?
말은 겁나 안 듣는데 진짜 똑똑한 것 같아. 애기 때 집에 오고 이틀만에 똥오줌을 가렸다니까…(주절주절)…"
하지만 남에게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나의 반려견은 사실 철천지 웬수다. 인터넷을 장악한 '짤' 속에서 깜찍하게 미소짓고 있는 강아지들도 사실 뒤에서는 둘도 없는 악마일 것이다. 영상 속 주인들은 언제나 행복해보이지만 인스타에 아름다운 사진만 올라온다고 계정주의 모든 일상이 아름다운 건 아니지 않나. 깨물어주고 싶은 반려견 짤들은 내 갤러리에만 수십수백개지만 그 반대인, 반려견을 키움으로써 겪는 불편한 일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실제로 강아지를 키우는 일은 온갖 귀엽지 않은 문제들을 초래한다.
다섯살배기 인간 아기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개의 지능이 다섯살 아기와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무릎을 탁 쳤다. 우리집 개만 봐도 어떨 땐 맹하면서 어떨 땐 영리하고, 때론 약이 오르도록 말을 안 듣는 모양새가 딱 미운 다섯살이었다. 집안 벽지를 뜯어 놓는 건 예사고 엄마 안경, 내 안경, 아빠 돋보기, 종류도 참 고루고루 씹어 드셨다. 이빨이 얼마나 튼튼한가 하면 핸드폰 액정도 거뜬히 부술 정도였다. 덕분에 아빠와 엄마는 핸드폰을 바꿨다. 가죽 냄새는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비싼 장지갑을 물어 뜯었고, 주둥이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 초토화시키는 무법견犬이라서 책 꽂으라고 만든 책꽂이에 책을 꽂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바닥에 절대 물건을 놓지 않는 버릇이 생겼는데 아차하는 순간 희생물(건)이 나왔다. 리모콘 적어도 세 개가 명을 달리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양말이 짝을 잃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속옷이 걸레로 재탄생했다.
다시 살 수 있는 물건이면 그나마 낫다.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물건들도 개중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했던 물건은 세 살때부터 내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제리(<톰과 제리>의 그 제리) 인형이었다. 나의 깜찍한 귀염둥이는 내 단짝의 눈알을 뽑아 방 한 구석에 전시해놓고도 모자라 코의 실밥을 죄다 씹어 놨다. 그 당시 내 기분은 굳이 서술하지 않겠다.
씹고 뜯는 것만 문제였느냐. 아니다. 소변도 문제였다. 배변 가리는 데 속썩였던 아이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이불에 실례를 했다. 두 가지 경우였는데, 첫째는 화장실이 더러울 때다. 어찌나 깔끔을 떠시는지 발바닥에 소변 안 묻히려고 깨끔발을 드는데, 눌 자리가 없다 싶으면 바로 이불로 직행했다. 둘째는 자신이 심술이 났음을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을 때로, 이 때가 가장 기가 막히다. 가족들이 보고 화를 낼 만한 곳에 소변을 누기 때문이다. 방문 앞과 이불 위가 그 중 대표격이다. 왜 이런 곳에 소변을 봤냐고 혼을 내봤자 으르렁댈 뿐 그닥 알아들은 것 같지도 않다.
다섯살 어린 아이는 그래도 데리고 다닐 수나 있지, 반려견과는 여행을 가기도 어렵다. 내가 중학생 시절 강아지가 입양 온 뒤로 우리 가족은 가족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강아지를 맡길 수 있는 강아지 전용 호텔이 있지만 우리집 강아지는 어릴 적 덩치 큰 개에게 물린 뒤로 다른 개만 보면 질색을 하는 터라 맡길 수가 없었다. 애완견이 출입할 수 있는 여행지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애완견 출입금지' 글자 앞에 마음이 작아졌다. 게다가 차를 타고 먼 길을 가는 건 아무래도 강아지에게 무리였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강아지 때문에 발 돌리던 날들이여. 가족여행은 둘째치더라도, 강아지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 가족 구성원끼리 일정을 조정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뿐인가. 강아지를 데리고 병원 갈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귓병, 주기적으로 맞는 주사, 미용, 알러지(생각보다 강아지 알러지가 흔한 병이었다) 등등. 비용도 무시 못할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개는 아픔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순간 마음을 졸여야 했다. 거기다 남들처럼 산책을 매일 시키지도 못하고 좋은 걸 먹이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책이 쌓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그 어떤 영상보다 <TV 동물농장>이 슬프게 느껴진다. 본방을 사수해본 적은 없지만 재방송이나 유투브로 영상을 볼 때마다 눈물을 줄줄 흘린다. 어떤 영상이든 상관없다. 말 안 듣는 '댕댕이'들이 마당을 뛰어다니든, 소방대원들이 하수구에 빠진 고양이를 구하든, '뚱냥이' 집사가 다이어트 대작전을 벌이든, 어느 순간 눈물이 터져버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모양이다.
2014년 농림축산식품부가 파악한 바 전국 반려견은 모두 161만1289마리다. 확실한 수치가 아니어서, 실제 반려견 숫자는 몇 배일 것으로 추정된다. 반려견과 함께 사는 인구는 1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 모듣 애견인들이 반려견과 함께 살며 크고 작은 문제를 겪는다. 그러나 대중이 사랑하는 '짤'들은 이 모든 맥락으로부터 탈각된 채로 유포된다. 때론 가족을 힘들게 하는 강아지, 시간과 돈이 없으면 돌보기 힘든 강아지의 실체는 지워지고 행복의 상징으로만 남는다.
그러나 현실의 강아지는 귀여운 인형이 아니다. 한 생명을 입양했다면 그만큼의 책임이 요구된다. 그 책임을 회피하는 무도한 사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있다. 많은 반려견이 버려진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집계한 유기견은 한 해 평균 6만마리가량이다. 집계되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약 10만마리를 훌쩍 넘을 것으로 계산된다. 늙어 병이 들거나 사고로 다쳤다는 이유로 숱한 반려견들이 '고려장' 된다. 강아지가 사랑스럽다면, 사랑하는 만큼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강아지 '움짤'에 '좋아요'를 보내며, 오늘도 버려지는 수많은 목숨들을 떠올린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