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콩나물을 키우는 거야.
개학을 앞두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물었다.
"방학을 알차게 보내서 재미있었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예쁘고 착한 모범적인 아이들도 있었고
"너무 금방 끝나버려 허무했다."라는 공감을 끌어내는 대부분의 아이들도 있었지만
"개학이 돌아온다. 마치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것 같다."라며 격하게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듯한 아이도 있다.
너희만 그런 줄 아니? 나도 그래.
물론 모든 교사들이 그러하지 않을 테니 편견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 알콩달콩 쌓을 2학기의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다. 솔직히 2%쯤.
나머지는 온갖 걱정과 불안의 98%.
'아! 그 아이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겠지. 거친 행동과 정제되지 않는 말들을 또 들어야 해.'
'아~ 그 학부모는 또 얼마나 많은 민원을 넣을까.'
'학교행사가 또 휘몰아치겠지. 입학원서에 졸업식까지 준비시켜야 하니. 이것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난 왜 사업을 벌여놓았을까. 마무리하는 책이 나오기는 할까.'
불안과 걱정으로 꿈자리는 뒤숭숭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며 평소보다 더 빨리 늙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더 속도감 있게 늙어가고 있는 마의 구간일지도 모른다. 얼른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있는 나를 보아하니.
어째 경력이 20년이나 되는데도 같은 마음으로 개학을 맞이한다.
98%의 걱정과 불안 중 실제로 일어날 일은 몇 퍼센트쯤 될까?
어제 선생님들이 무려 900명이나 모여있는 단체톡방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너무 충격입니다. 1학기에 학급활동이나 이벤트를 많이 하고 간식도 많이 주고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담임 때문에 힘들었다는 거예요. 늘 감사하다는 소리를 들었지 이런 말은 처음 들어요."
누군가의 고백에 또 누군가가 답했다.
"제 애기인 줄 알았어요."
너무나 간단한 명제다. 교사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일이다.
1. 시간과 돈을 들여 열심히 한다.
2. 힘이 든다.
3. 아이들이 몰라준다.
4. 화가 나며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나 또한 그러했다. 교과서만 기본적으로 가르쳐도 될 것을 있는 행사 없는 행사를 만들고 재구성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활동을 넣고 그걸 또 책으로 만들고 잔치를 하는 등.
한마디로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몸을 갈아 넣는 동안에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우와. 나 좀 괜찮은 교사인데? 우리 애가 나 같은 교사를 만났어야 해.'
그러다 기획한 활동에 전혀 관심 없는 학생과 그 노고를 모르는 학부모 벽을 만나면 이내 상처를 받는다.
'내가 이렇게 까지 했는데 그걸 몰라준단 말이야? 내가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이제 고마 치워뿔까?'
잘 생각해야 한다.
진짜. 누구 때문이었는지?
그를 위함인지. 그를 위하고 있는 나를 위함인지.
모든 사랑하는 관계에서 공평하게 똑같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차별적으로 존재한다.
김여사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김여사를 더 사랑하지 못한다. 절대
우리 딸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훨씬 더 우리 딸을 사랑한다고 절대적으로 말할 수 있다.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만 내가 그를 위해 하는 것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상대적으로.
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야 한다. 비록 어려울지라도.
교사와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원래 공평하지 않다.
그런데 유독 왜 내가 주는 것보다 받는 사랑이 작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화가 난다. 나도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내 사랑의 크기를 줄이면 될까?
정답은 없다.
스스로가 찾아내야 한다.
그나마 20년 경력의 내가 찾은 답 중 하나는 이렇다.
크게, 티 나게, 폭포처럼 부어주지 말자.
조금씩, 자주, 그런 듯 안 그런 듯, 바가지로 부어주자.
그래야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
그래야 콩나물은 쑥쑥 자란다.
참, 나도 콩나물이고 너도 콩나물이다.
혹시 더 괜찮은 답이 있거들랑 알려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