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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희 Nov 29. 2021

미혼-기혼 편가르는 쌍팔년도 조직 문화

 악습의 콜라보



 며칠 째 새벽 출근하고, 어둑어둑할 때 퇴근하며 가끔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불면증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지는 날들의 연속이었죠. 

 그날 역시 전날의 야근 여파로 비몽사몽 출근한 날이었습니다. 까악 울며 머리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에 왠지 암울한 기운이 느껴졌던 출근길이 기억납니다. 늘 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아, 사무실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벨이 미친 듯이 울려댔죠. 전화 한 통마다 확인해야 할 절차와 해결해야 될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그 와중에 계속되는 업체 미팅들. 당일 계획해둔 업무는 시작도 못한 채 밀려들어오는 일들의 연속에 한계치가 머리 꼭대기까지 다 달았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팀장님의 호출이 떨어졌습니다.


 내심 업무 조정해주시려나 기대를 품고 일어나 회의실로 갔죠. 회의실에는 어쩐 일인지 곧 육아휴직이 예정되어있던 A대리가 함께 앉아있더군요. 왠지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A대리 옆, 별다른 표정 읽기가 힘든 팀장님이 한 마디 툭 내뱉었습니다.


자기가 A대리 대직 업무 좀 맡자~


 사전 협의 없는 팀장님의 통보에 당황스러웠고, 머릿속으로는 이미 쌓여있는 업무와 앞으로 예정되어 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옆에 A대리가 있으니 대놓고 싫다는 말도 못 하겠고, 이미 결정되어있는 듯한 사안에 반박하기가 뭐해서..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것마냥 끙끙대다가 원하는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회의실을 나왔습니다. 표정관리도 안되더군요. 옆에서 괜히 A대리가 안절부절 미안해할 뿐입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와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이메일과 확인 요청 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푸욱 나오더군요. 나도 모르게 '왜 하필 이 바쁜 시기에 육아휴직을 써서..'라는 원망의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A대리의 대직 업무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 공표된 순간, 팀원들의 안타깝다는 눈빛 속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캐치하고는 더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누구 하나 추가 업무 분장이 필요하지 않느냐던가 선뜻 돕겠다는 말을 하지 않더군요. 


 가슴에 큰 돌덩이가 들어앉아있는거마냥 심란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을 때, 오랜만에 전 직장동료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곧 출산을 앞둔 그녀는 출산휴가에 붙여 육아휴직을 쓸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 했죠. 얼마 전 눈치를 보다 상사에게 운을 띄웠더니 그닥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인력 충원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요. 기존 직원들에게 본인의 업무가 나뉘어 배정된다면 상당히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해질텐데.. 걱정이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그녀에게 얘기했습니다.

왜 법적으로 정해진 휴가를 쓰는 건데도 눈치를 보느냐고. 

지금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휴가 못쓴 걸 두고두고 후회할 거라고.


 말하고 나서 저도 모르게 순간 A대리 얼굴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아.. 일에 치여 잠시나마 원망의 마음을 가졌던 게 미안해졌습니다.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나 죄책감도 들더군요. 


 찬찬히 되짚어보니 A대리를 원망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A대리는 본인의 정당한 권리인 유아휴직을 요청한 게 다였을 뿐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육아휴직 대체 인력을 뽑지 않은 조직 내부의 제도적 문제, 또 팀원들 간의 업무를 형평성 있게 분배하지 못한 관리자, 그리고 내 일 아니니 모르쇠로 일관하는 팀원들이 만들어낸 경직되고 불합리한 조직문화의 콜라보였죠.



 비단 이 뿐 아니라 유사한 다른 케이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애먼 당사자들만 서로 불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일단 기혼 입장에서는 잘못한 게 없음에도 이상하게 본인이 미안해져 버리거나 미혼의 눈치를 봐야 되는 상황이 됩니다. 배려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도 말이죠. 또 미혼 입장에서는 무언가 서럽거나 역차별받는다고 느끼게 되구요. 원망의 화살이 애꿎은 기혼자에게 향할 때면, '이런 마음이 든다니, 나 못된 건가'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미혼과 기혼 모두 힘든 상황이 되어버리는 거죠. 사실은 불합리한 조직 시스템의 문제임에도 서로를 원망하며 편 가르기 싸움하듯 돼버리는 겁니다


 프레임을 바꿔본다면 문제의 본질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제도적 장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직에서 시스템적으로 잘 보완이 되고, 제도가 형평성 있게 뒷받침된다면 이렇게 서로 불편한 상황이 될 필요가 없겠죠. 무언가 백업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인력을 더 충원하거나, 공평하게 업무 배분하는 등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시스템이 정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이러한 불합리한 체계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조직문화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업무를 적절히 배분하거나 갈등을 중재하는 게 리더의 역할이지만, 여전히 역량 부족한 관리자들이 많은 것 또한 현실이구요. 겉으로 아무 일 없는냥 봉합을 해도 소수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쌓여간다면, 점점 상호 간의 불신과 균열이 난무하게 될 뿐이죠. 결국 장기적으로 조직 전체의 생산성 측면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예전보다는 제도적으로 정착화되고 요즘 조직문화도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구시대적 유물처럼 달라지지 않은 불합리한 시스템을 접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보수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에서 유독 그런 케이스가 많구요. 아직 사회적으로든 직장 내에서든 제도적인 범위가 미처 닿지 못한 영역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희생을 강요받거나 마음이 다치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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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고 바로 바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희망 회로를 한 번 돌려봅니다.


제도적 사각지대가 없는 탄탄한 시스템이 구축되기를.

합리적으로 의사 결정하는 관리자가 늘어나기를.

조직의 불합리한 행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개선하려는 동료가 많아지기를.

 


지금은 비록 척박한 환경일지라도 그렇게 된다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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