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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희 Jun 05. 2024

이건 마치 서커스단 코끼리

#2. 자율성의 부재



08:30


 김 대리는 10kg 족쇄가 달린 것 마냥 발을 질질 끌며 회사 건물로 들어선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멍하니 조여 오는 숫자를 바라본다. 5-4-3-2-1, 이윽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떠밀리듯 들어선 엘리베이터 안에서 머리를 굴려본다. '가자마자 제안서 마무리하고, 고객사 미팅 잡고, PT 준비하고....' 그가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근 지문을 찍고, 벌집 같은 파티션 너머 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울려대는 벨소리. 김 대리는 가방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전화를 받는다. 또다시 어제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타닥타닥' 자판 소리와 함께, 한 방향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직원들. 김 대리는 어쩐지 잘 정비된 노예 군단 같다는 생각을 하며,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린다. 노예 37번은 이렇게 카페인을 수혈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뇌도 쉬고 싶을 텐데 주인 잘못 만나서 쉬지도 못하고, 문득 그는 억지로 각성당하는 뇌가 불쌍해진다. 밤사이 도착한 이메일에 답장하고 전화 몇 통을 받다 보니 몇 시간이 몇 분처럼 흐른다.


"점심 먹지"


 학교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박 팀장의 구령 소리. 김 대리는 딱히 밥 생각은 없지만, 미적미적 일어난다. 의자에 걸어둔 겉옷을 걸치며 책상 위의 다이어리를 흘깃 내려다본다.


TO DO LIST

1. 제안서 완성

2. 고객사 미팅 조율

3. PT 준비

4. 운영보고서 작성

5. 프로젝트 셋업 준비

.

.

.


그는 아직 'TO DO LIST'를 하나도 지우지 못했다.



11:50


 해장이 필요하다는 박 팀장을 따라 향한 해장국집. 오늘도 식당은 북적인다. 취향보다 속도가 생명인 점심시간엔 웬만하면 같은 메뉴로 통일한다. 곧이어 손 빠른 막내들의 물 세팅, 수저 세팅이 이어진다. 문득 김 대리는 식탁 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손들이 칼군무 공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이 펄럭 앞치마까지 건네지면 팔팔 끓는 해장국이 나온다. 오늘 당첨 돼버린 박 팀장 앞자리 탓에, 김 대리는 미션이 하나 더 생겼다. 티슈 건네기, 반찬 리필 타이밍 잡기 등. 중간중간 관심 없는 가십거리도 이야기해가면서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다. 박 팀장의 식사 속도는 왜 그리 빠른지, 3배속으로 따라가려 노력하지만 역부족이다. 다들 하나둘 씩 수저를 놓을 때쯤, 김 대리도 마지막 한 숟가락을 듬뿍 떠서 입 속에 욱여넣고, 스테인리스 밥그릇 뚜껑을 덮는다.


"잘 먹었습니다."


 결제 끝난 법인카드를 향해 우렁차게 인사하는 직원들. 계산을 하는 박 팀장 뒤로 빠져있던 몇몇 직원들은, 식당을 등지며 자연스레 뭉치고 흩어진다. 미처 커피 그룹에 합류할 타이밍을 놓친 김 대리는, 산책 좀 하자는 박 팀장을 어물쩍 따라나선다. 내 몸매 유지 비결은 식후 산책이라며 근처 공원으로 이끄는 박 팀장. 김 대리는 원치 않게 공원 몇 바퀴를 빠르게 걷는다. 건강으로 시작해서 이어지는 신규 프로젝트 얘기에, 김 대리는 국밥이 명치끝에 얹힌 것 같다. 



13:00


 사무실 자리에 앉자 서서히 밀려오는 졸음. 김 대리는 한번 더 뇌에게 사과하며, 카페인을 수혈한다. 이미 탕비실은 인산인해다. 노예들의 세미 휴식시간이랄까. 하품과 함께 안부를 건네며 커피를 뽑고, 각자 할당된 노동에 대한 푸념을 주고받는다. 그때 멀리서 등장하는, 푸념의 주범. 다들 간수를 본냥 기겁하며 하나둘씩 제자리로 돌아간다.

 

 김 대리는 비장하게 모니터 앞에 커피를 두고 제안서 파일을 더블 클릭한다. 심혈을 기울여 타이핑을 시작한다. 한 문장 써넣기 무섭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리고 연이어 깜박이는 메신저 창들. '오늘까지', '급해요', '지금 안 돼요?'라는 메신저가 난무한다. 어느 책에서 일의 우선순위는 긴급도보다 중요도를 기준으로 선택하라던데, 그 말은 개뿔. 직급 낮을 땐 무조건 급한 게 먼저다. 강하게 푸시하는 순서로 요청 자료 보내주고, 확인 사항 검토해주고, 긴급 소집되는 회의들에 참석하고. 긴급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벌써 오후 세시다. 아직 오늘 계획한 업무 리스트 중에 하나도 못 끝냈다. 그는 낮게 욕을 읊조리며 다시 제안서 파일을 띄운다.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43p, '개선방안'을 펼쳐두고 껌벅껌벅 커서만 바라보다가, 눈도 껌벅껌벅. 이대로 있다가 머릿속 퓨즈도 나갈 것 같아서 화장실로 향한다.


 사무실보다 살짝 컴컴한 화장실에는 손바닥 두 개 정도 너비의 창문이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한줄기를 보던 김 대리는 문득, 오늘 처음 하늘을 본다는 생각이 든다. 형기 없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다. 아까 얹힌 국밥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속은 계속 갑갑하다.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인기척. 김 대리는 황급히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몸을 숨긴다. 왜 숨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다. 몸을 쭉 뻗기에는 비좁은 공간에서 그는 비로소 숨을 쉰다. 회사 내 유일한 아지트다. 변기에 앉아 단톡방에 올라온 유튜브 쇼츠를 클릭한다. 분명 다들 웃기다는데, 그래서 웃고 있는데, 웃기지가 않는다. 쌓인 업무 생각이 난다. 마음이 무겁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커피를 들이붓지만 제안서는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다른 업무라도 먼저 쳐내야지 싶다. 고객사 미팅 조율차 다시 한번 담당자에게 연락을 한다. 이미 여러 차례 메일과 전화를 했음에도 고객사 담당은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이렇게 묵묵응답인 경우는 완곡한 거절임을 알고 있음에도 김 대리는 포기할 수 없다. 사실 마음으로는 애저녁에 포기했다. 이만하면 할 만큼 한 게 아닌가 싶지만, 선임은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야지'라며 계속 연락을 종용한다. '아~ 나도 갑질 한번 해봤으면'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물론 속으로). 



18:20


벌써 퇴근 시간이 지났다.

제안서를 써야 PT 준비를 할 텐데, 제안서를 못 끝냈다.

결국 오늘 'TO DO LIST' 중에 제대로 끝낸 업무는 없다.


탕비실에서 네 번째 커피를 내리며 야근각인가 고민하는데, 불쑥 들어오는 정 이사. 

서류 가방을 고쳐 들며 김 대리의 손에 들린 커피를 심드렁히 바라본다. 왜 아직 퇴근 안 하느냐 묻는다. 제안서 내일까지 보고하라고 시킨게 누군데, 김 대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이 남았다고 답한다. 정 이사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그럼 나도 야근하게? 얼른 퇴~근~해~~~"


김 대리는 농담인가 싶으면서도 괜스레 기분이 나쁘다. 

문득 유명한 코끼리 일화가 떠오른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한참을 묶어두었다가 풀어주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는 말. 

어쩌면 자신이 그 코끼리 아닌가 싶다.






직장생활은 왜 힘든 걸까?


#. 자율성의 부재


 직장인이 고달픈 가장 큰 이유는 자율성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 채용 확정이 되고 근로계약을 맺는 순간, 조직의 체계와 규율에 따라야 하는 의무가 생겨납니다. 근무 시간부터 업무 내용 등에 이르기까지, 근로계약을 지키고 성실히 이행해야 하지요. 어디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뿐일까요,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그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습니다. 


 자율성과 스트레스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자료를 본 적 있습니다. 두 가지 지표는 반비례 관계라고 합니다. 자율성이 낮다고 느낄수록 스트레스의 강도는 높아진다고 하죠.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 존엄성과 삶의 만족도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자기 효능감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요. 

 직급과 자율성 역시 대개 반비례합니다. 어느 조직이나 위계질서란 존재하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의사결정의 폭이 넓어지지요. 반면 아래 직급의 경우에는 '눈치껏'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할 일도 많고, 의사결정의 권한도 제한적입니다. 


 어느 정도 자율성이 보장되면 직장 스트레스도 조금은 줄어들 텐데, 대다수 직장인에게는 언감생심 꿈꾸기 어려운 일입니다. 소수에게만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혜택(?)이랄까요. 

 '자율성이 보장되는 직장인'이란 마치 '매출 걱정 없는 자영업자'처럼, 유니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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