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약 Nov 26. 2023

일과 육아, 열심히만 하면 되지 않아?

불가능한 밸런스 게임의 시작

온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던 때가 있었다. 

가정과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해야 할 것들은 매년 정해진 순서에 따라 흘러갔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책임져주는 존재와 시스템 안에서 난 딱 내 몫의 것들만 감당하면 되었다. 적당히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환경 속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니, 그래도 남들만큼은 먹고살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것.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열심히 = 성공'이며, '성공하지 못한 것 =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삶의 신념은 얼마나 오만방자했던가.


내가 보기에 내가 꽤 괜찮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나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것이라 여겼다. 내가 참 잘 났고, 회사도 잘 굴러갔고, 그 속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 보람도 컸다. 친구들도 많아 이 모임 저 모임 참 바쁘게도 다녔다. 24시간을 쪼개고 쪼개면 일도, 연애도, 친구도 모두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홍 대리는 매일 새벽까지 야근을 하면서 언제 그렇게 놀고 연애까지 해?"

"시간을 잘~ 쪼개 쓰면 돼요~" 나는 실실 거리며 대답하곤 했다.


사실은 잠 잘 시간을 줄이고 한 번씩 몰아서 잤다. 그래도 몸이 참 가뿐했다. 일이든 노는 것이든 매 순간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후회 없이 알차게 보냈다. 소홀했던 것이 있다면 부모님이었다.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고, 부모님 얼굴을 거의 못 보며 한 세월이 지나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부모님은 늘 나의 사회생활을 응원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셔 주셨으니까.


그렇게 사느라 참 바빴다. 이 세상에서 내 시계만 2배속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끼고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며 같은 시간도 몇 배는 효율적으로 쓰느라 애썼다. 하늘 한번 바라보며 느린 숨을 몰아쉬며 늘어지는 휴식을 취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평일 낮에 외근을 나가면 커피숍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거나,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주부들을 보면, '저 사람은 참 여유로운 삶을 사는구나' 싶었다. 부럽다. 어떻게 하면 저런 일상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나에게는 없는 삶이겠지. 나는 저들과 다른 사람이니까. 나는 일 하는 사람이니까. 지금 내가 온 힘을 다 해 애쓰는 이 시간이 얼마나 큰 성과를 이뤄내고 있는데... 그래서 난 저들과 다른 사람이라며 그들과 나 사이에 선을 그었다.


결혼 직후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낳고 싶어 결혼을 한 것이기도 했다. 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지금의 일을 잘 할 자신이 있었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결혼식 2달 만에 임신 2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역시 세상 일이 참 내가 계획하고 행한 대로 잘 이루어졌다. 오랜 기다림은 아니었지만, 늘 꿈꾸던 로망이었기에 기뻤다. 와인잔에 우유를 따라 남편과 건배를 하며 등갈비를 구워 먹었다. 설렜다. 자신도 있었다. 

내가 보여주리라. 일도 육아도 둘 다 잘하는 슈퍼우먼을. 들뜬 마음과 함께 뱃속의 아이가 자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참 잘 해왔거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해 하나씩 극복해 나가면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난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일도, 친구도, 사랑도... 아무리 바빠도 난 다 잘했거든.


그땐 몰랐다. 그 생각부터가 틀려먹었기에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전 01화 처음 어머니라고 불리던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