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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Mar 24. 2024

모두에게 내가 죄인

숨 막히는 워킹맘

언제부터였을까. 어깨 위에 너무 많은 것이 올라와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일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커져버린 역할만큼 모든 책임의 화살 또한 결국 내게 돌아오곤 했다.

그쯤이었던 것 같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 시작했던 게…




내가 꼬꼬마였던 시절부터 언제나 아빠는 속에 담아 둔 불만을 꼭 술의 힘을 빌어 얘기하곤 했다. 술과 담배 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와 검붉어지고 울퉁불퉁한 얼굴로 콧김을 푹푹 내뱉으며, 전혀 나이스하지 못한 거친 표현으로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꼬부라진 목소리.


“결혼을 했으면은.. 어? 너희 일은 너희가 해결해야지. 너 때문에 결국 내가 피해보는 거야. 어? 너네 엄마가 너희들 키우느라 고생했으면 됐지. 이제 좀 편하게 살려고 했더니 니 새끼들까지 키워줘야 하냐? 니 새끼들 키우느라 니네 엄마가 다 늙은 나를 못 챙기는 게 말이 되냐고.”


아빠가 지방으로 발령이 났을 때 엄마는 한사코 아빠를 따라가는 것을 거부했다. 아빠와 단둘이 낯선 지방에서 살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엄마에게는 손주를 봐야 한다는 명분이 너무 명확했다. 그래도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서라고 잘 말해주셨다면 어땠을까. 본인은 아빠를 너무 따라가고 싶지만 얘가 아이들 봐달라고 못 가게 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게 엄마는 더 편했나 보다.  


“내가 미쳤냐. 이 나이 먹고 니네 아빠 옆에서 수발들러 따라가게. 야 말도 마라. 끔찍하다.”

내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엄마에게 아빠를 먼저 챙기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사실은 나도 엄마가 절실히 필요한 게 맞았다. 그래서 난 아빠 앞에 할 말이 없는 죄인일 뿐이었다.



 

잊을만하면 불쑥 연락을 해오는 언니도 툭하면 불만을 토해냈다.


“너 때문에 엄마가 내 애는 안 봐준단다. 그건 너무 불공평하다. 너 엄마한테 잘해라. 지금 용돈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냐. 베이비시터 구하면 그 배는 더 들어갈 거니 그만큼은 엄마한테 드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결국 사달이 나버렸다. 카톡 메시지로 선 넘는 쌍욕 세례가 차단을 하기 직전까지 수류탄 터지듯 쏟아졌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언니와의 잦은 마찰로 늘 힘들어했다. 언니가 결혼을 하기 직전까지도 이 모녀는 늘 악을 쓰고 서로에게 칼이 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싸우고 집을 나가길 반복했다.


“니네 언니 애는 죽어도 안 봐줄 거다”


엄마는 조카를 봐주는 일에 대해서는  질색하고 학을 뗐지만, 언니의 면전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적절한 이유. 그리고 사실이기도 한 핑계. 우리 아이를 봐줘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미안해하며 말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내 입장에선 엄마가 필요했고 사실이었으니, 난 또 언니에게도 죄인이 되고 만다.




욕을 먹는 게 너무 싫었다.

하지만 억울하면서도 이기적으로 굴 수밖에 없는 난, 언제나 가족에게 죄인이었다.


‘엄마’보다 ‘아빠’라는 말을 먼저 하고,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첫째.

못난 엄마는 그게 참 서운했다.

내가 놓쳐버린 아이의 성장 과정. 그리고 그에 대한 아쉬움보다 늘 앞서는 죄책감.


늦잠을 자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를 찾으며 서럽게 울던 둘째,

엄마를 찾는 동영상을 사무실에서 보며 그게 그렇게 가슴에 사무친다.


힘든 마음을 토닥여주기는커녕 “이젠 너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번 주에 시간 언제 돼? 시간 될 때 이혼하러 가자.”라는 말로 나를 무너뜨리는 남편.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그 문장은 가슴에 콕 박혀 다시는 우리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는 아마 기억 속에서 지웠을 것이다. 아마도 자기 입에서 내뱉은 잔인한 그 말을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고 서러워서 그 이후 다시는 그때의 이야기를 내 입으로 다시 꺼낸 적이 없었으니까.


회사의 대표님은 24시간 올인하지 않는(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회사의 임원으로서 탐탁지 않아 했다. 탐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수시로 전 직원 앞에서 난도질해 본보기로 삼았다. 회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대표님의 욕심과 변덕은 날로 심해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조차 내가 담아내고 성장해야 할 몫이라 여겼던 내 무식함의 죄가 더 컸다.  


숨이 막혔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내 탓. 난 모두에게 죄인이었다.

사람을 마주하기 싫었다.


누군가가 내게 어떤 용건을 들고 찾아올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 무슨 일일까.


지금의 나는 같은 모습으로 살아있지만…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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