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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Dec 28. 2023

너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시작은 아이의 교우관계 문제로 인한 담임 선생님의 심리상담 권유였다. 몇 차례의 심리상담을 통해 아이는 조용한 ADHD로 의심될 만큼 부산스러운 게 맞았고, 엄마에 대한 상이 부정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그린 엄마의 얼굴은 마치 유령과도 흡사했다. 퀭 한 눈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매우 약한 필력은 억지로 그린 듯한 그림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약 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언뜻 보여준 그 그림은 며칠째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어머님 검사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위해 어머님의 성향을 잘 아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다면적 인성검사라는 걸 했다. 수백 개의 질문과 수십 개의 문장완성검사, 그리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상태를 진단했다. 원래 외향형이었으나 결혼 이후 내향형으로 바뀌었다고 느끼고 있기는 했는데, 지금의 나는 극내향형의 사람이라고 했다. 매우 높은 수치로 순종적인 성향과 여성성이 강하다고도 했다. 이렇게 내가 나 자신을 모른다. 스스로 자주적이며 중성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도대체 누구였던 것일까. 여태껏 알고 있던 나 자신을 다시 재정의 하는 시간은 분명 의미가 있는 듯했다. 의존성과 순종적 성향이 강한 엄마는 아이를 지나치게 끼고 키우며 자칫 잔소리가 많아질 수 있다고 했다. 체제와 규범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려 했던, 그래서 늘 고지식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던 건 순종적 성향에서 기인한 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보니,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러면서도 그런 마음을 줄곧 숨기며 지낼 수밖에 없어 사회적 불편감이 컸던 것이다. 반대로 아이는 독립성이 강하며, 조절력이 약해 과잉 행동을 많이 하다 보니 사사건건 나 같은 엄마랑 부딪혔던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우울감이었다. 정상 범주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우울 지수가 순간순간 버럭 화를 내거나 짜증 섞인 태도를 보였던 내 모습을 증명하는 듯했다.


“선생님, 저도 자꾸 우울감이 느껴져 힘들었는데, 사실 제가 딱히 안 좋은 일이 없거든요.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불행한 사건이 있지 않아요.”


“어머니, 불행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는 게 아니에요. 불행하면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되죠.”


“제가 그래서 기분이 다운될 때면 뭐든 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거나… 최근에 그래서 안 하던 학습지 교사 일도 시작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좋아지는 기분이 들지 않아요.”


“제가 볼 때 어머님은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살아오셨어요. 그래서 그런 삶의 방식이 익숙했던 거죠. 3~4년 전 갑작스럽게 일을 관둔 직후에는 할 게 많았을 거예요. 그동안 못한 일도 하고 아이들도 챙기고… 그러느라 한 동안은 아마 정신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점점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되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다고 느껴지면서 안정적인 상황이 되자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감정이 몰려오는 거예요. 여전히 무언가를 계속 열심히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자꾸 무언가를 하려는 것. 그걸 Doing 이라고 해요.

너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느껴야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정말 그럴까? 그런 말은 그저 위로를 위한 문장이라 생각했었다. 그 순간의 감정을 어루만져줄 뿐, 사실은 신체 건강한 성인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정말 괜찮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 무언가를 하려고 애썼던 마음이 오히려 나 자신을 우울감에 잡아 먹히게 하고, 가족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 같아 마음이 또 아팠다.


정말… 굳이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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