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약 May 12. 2024

떨리는 손으로 남의 집 벨을 누르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직장을 그만 둔지 어느새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으로 출근할 곳이 없는 아침을 맞이했던 그날,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만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하며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회복될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이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빠져있을 땐 쉽게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밀렸던 많은 숙제를 해결했지만, 난 다시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일이 방문교사였다.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다들 내가 원래 하던 업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사무실 노트북의 전원을 끄기 직전 15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업에 대한 개인 자산을 모두 영구 삭제할 때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 다짐이 얼마나 고집스러웠는지 모르고 하는 말들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전무했던 내가 방문교사라니… 경험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고된 업무에 비해 돈벌이도 크지 않다. 평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꿈이 있던 것도 아니다. 매일 수업 시간에 쫓기며 일일이 집집마다 찾아가 남의 집 벨을 누르며 문 앞에서 텐션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한다. 과목당 10분. 쇼미더머니가 따로 없다. 정해진 시간 안에 핵심만 딱딱 짚어 쉴 새 없이 말을 해야 한다. 그 사이 아이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시간 내에 미션을 마칠 수 없다. 그렇게 타임벨이 울리기 전에 미션을 클리어하고 다시 그 집을 나서야 다음 수업지까지 제시간에 도착해 다음 미션을 시작할 수 있다. 이건 뭐 시한폭탄을 들고 옮기는 스피드 게임 같은 느낌이랄까.


 이 일을 시작한 여름에는 유난히 폭우가 쏟아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축축해진 옷차림으로 이 집 저 집 방문하는 것은 꽤 안쓰러워 보이는 일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만 3세 여자 아이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는 날이었다. 나이가 어린아이에게는 자음, 모음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주변의 친숙한 사물을 주제로 재미있게 놀이를 하며 통글자를 자연스럽게 인지시켜주는 수업을 한다. 전날까지 철저히 준비한 교재의 내용대로 수수께끼 놀이를 시작했다.


“이건 맛있는 음식이야~ 가늘고 긴 면발에 토마토소스가 뿌려져 있고 포크로 돌돌 말아~ 후루룩하고 먹는 이 음식은 뭘까~요?”


스파게티 그림까지 보여주며 수수께끼를 냈지만 아이는 죽어도 ‘스파게티’라는 정답을 맞히지 못 하자 난 당황하기 시작했다.


“응~ 정답은 바로~ 스파게티! 우리 XX이 스파게티 먹어 본 적 있어?”


“아니요? 먹어본 적 없는데요? 모르는데요?”


음… 스파게티를 얘기해야 ‘스’라는 글자를 가르쳐줄 건데…


그 이후로 나오는 모든 낱말을 아이는 계속해서 모른다고만 했다. 분명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낱말마저도 모른다고만 하는 오늘 처음 만난 이 아이. 짧은 15분 동안 내 정신은 점점 안드로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글 수업이 끝나고 수학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오른손과 왼손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 XX이 밥 먹을 때 어느 손으로 먹지?”


“잘 모르겠는데요…”


(또 시작이군)


“그렇구나~ (오른 손등에 별 모양 스티커를 붙여주며) 자~ 여기 스티커를 붙인 쪽이 오른손이야~”


“이거 싫어요. 떼주세요.”


"으으응…."


“자, 그럼 책을 보며 해보자~”


책에 나오는 그림은 아이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도록 등을 보이며 손을 들고 있는 그림이 나온다. 그림과 같은 방향의 손을 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 곰돌이처럼 우리 오른손을 들어볼까?”


곰돌이가 등을 보이며 오른손을 들고 있는 그림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자기가 뒤로 돌아 등을 보이며 앉고 고개를 뒤로 돌려 책을 보며 오른손을 들어야 할지 왼손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아… 이게 아닌데…’


“아니 저기 XX아~ 아까 선생님이 스티커 붙였던 손을 들어볼까?”


그 사이 아이는 이미 떼어진 스티커가 어디에 붙었었는지는 까먹은 지 오래다.


“음… XX아~ 이 손이 오른손이야~ 오른손 들어보자~ 그렇지!”


“이번엔 왼손~ 그렇지~”


겨우 겨우 오른손 왼손을 들어보기를 시도하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너무 바짝 다가간 바람에 번쩍 드는 아이의 손톱에 내 이마가 순식간에 긁혀버렸다. 당황한 아이는 내 이마를 보며 어쩔 줄을 모르며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안돼~ 울면 끝장이야.’ 나야말로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괜찮아~” 라며 억지로 수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이는 그로부터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 이마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당탕탕 엉망진창 수업을 겨우 마치고 아이 엄마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인사를 한 뒤 집 앞을 나서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다. 엘리베이터 옆에 서서 거울을 보고 그제야 이마에서 피가 주룩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망했구나.


또다시 폭우를 뚫고 집으로 운전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당분간 그냥 이렇게 살아 보기로 했다.


이전 15화 가로수길이 너무 화창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