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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May 26. 2024

엄마의 두 번째 밸런스 게임

적당히의 함정

다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50만 원 더 버는 정도라면 무리해서 일을 더 잡지는 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어조로 전달된 그의 말은 나에 대한 불만인지 걱정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사실 남편은 방문교사를 시작하겠다는 내 말이 진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했다. 애초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에 남편은 동의한 적이 없었고, 엉뚱하게도 이 일을 시작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내가 가졌던 생각과 마음에 대해 단 1%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와의 의논은 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것이 분명했으므로 몇 번의 지국장과의 만남과 20년 만에 작성한 입사지원서, 그리고 약 한 달간 진행된 직무 교육에 대해서 그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준비를 마쳤고,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전업맘으로 눌러앉은 이후 몇 년 간 나는 아이들을 위한 일정을 제외하고는 마치 히키코모리와도 같은 삶을 살았다. 결혼과 출산, 워킹맘이라는 폭풍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내 마음은 스치는 바람에도 찢길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이 세상이 모두 뾰족뾰족한 가시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세상에 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책임져야 할 어떤 일을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갇힌 동굴 속에서 움츠린 채 몇 해의 겨울이 지나고 봄바람이 다시 스치던 5월의 어느 날,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멍해진 머리가 억지로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 걸 남편이라는 사람의 뇌구조로 이해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일은 할만했다. 그리고 일은 좀 어떠냐는 말에 ‘할만하다’라는 내 대답은 흔치 않은 반응이었나 보다. 대개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약 1년 간 몸이 망가질 정도로 힘들어한다고 했다. 억 단위의 예산과 매출을 무게로 짓눌리던 과거의 업에 비교하면 일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졌고, 모든 아이들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기에 아이를 만나는 일 자체는 즐거웠다. 아직 경험과 요령이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워킹맘으로 이 일을 시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밸런스’였다. 과거에는 ‘워킹’과 ‘맘'의 비율이 8:2 정도 되었기에 그때 후회를 발판 삼아 내린 결정이었다. 내 본업은 ‘엄마’이고 ‘남는’ 시간만을 활용해 가벼운 부업 정도로 일을 하며 밸런스를 맞추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 곁에 있어주면서도 세상에 다시 나갈 용기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두 번째 밸런스 게임을 시작했다.




‘적당히’의 함정


어떤 일을 적당히 한다는 것은 혼자 하는 취미에나 적용이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고객과의 약속, 한정된 자원, 조직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 때에도 ‘적당히’라는 게 가능한 걸까. 꽤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그렇게도 살아가더라는 얘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적어도 내 세계관에서는 그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다. ‘적당히’라는 것이 말이다.


엄청나게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적당히 해서는 일정 기준 이상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한 능력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나를 만난 아이들이 학습을 잘 해내게끔 최선을 다 해 도와주고 싶었기에 준비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을 거절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결국 일은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경험도 요령도 신뢰도 얕디 얕은 신입 교사가 원하는 만큼 ‘적당히’ 즐길 수 있도록 일을 세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가족들은 동의하지 않은 엄마의 외출을 기다려줄 마음이 없었다.


그런 고민에 마음이 흔들릴 때쯤이면 결정적으로 나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말이 있었다.


“그 정도 벌겠다고 아이들을 방치하지는 마.”


초라함과 죄책감을 만들어 내는 이 한 마디면 엄마의 두 번째 도전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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