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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May 30. 2024

아동 심리상담센터를 권합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계절이었다. 아이의 학교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일은 마치 엄마로서의 성적표를 받으러 가는 것만큼이나 떨리는 일이다. 적당한 복장을 고민하다 꺼내 입은 중간 길이의 검은색 플레어스커트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의 예상이 쏟아내는 불안 때문인지, 갑자기 차가워진 가을바람이 스타킹을 뚫고 스몄기 때문인지 교정을 들어설 때쯤엔 온몸에 한기가 들며 떨려왔다.


초등학교 교실의 낮은 창문 너머로 선생님이 인자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교단 경험이 오랜 이 학교의 교무 부장인 첫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과 엄마들을 겪어 보신 얼굴로 본인의 교육 철학이 강단 있게 드러나는 분이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교육관과 어조는 나와 상당히 닮은 구석이 많았는데, 아이는 그런 점을 한편으로는 편안해하기도 불편해하기도 했다. 드르륵 열리는 미닫이 나무문을 조심스레 열고, 조신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가 자그마한 어린이용 교실 의자에 다리를 오므려 앉고 무릎 위에 가방을 살포시 얹어 놓았다.


짧은 인사 후 선생님은 먼저 상담 전 아이가 작성했던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그중 아이가 바라는 것 한 가지라는 항목이 내 눈길을 멈추게 했다.


‘엄마가 늦어도 9시 전에는 집에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핑 도는 바람에 당혹감에 휩싸였다. 최대한 눈을 부릅뜨며 눈물을 안으로 삼키려 했지만 표면 장력을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흐르기 직전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우리 둘 밖에 없는 조용한 교실에서 불과 1미터 앞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던 그녀가 나의 주책맞은 눈물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 분명 문제가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하겠지….’


선생님은 나의 눈물을 모른 척하셨지만 어쩌면 집을 나서기 전부터 짐작했던 대로 상담은 우려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쩌면 그녀는 나의 눈물을 보고 아이의 문제에 대해 타당성을 더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학교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훌쩍이는 엄마가 되다니. 초라했다.


“OO이가 참 엉뚱해요~? 어머니?”


알 수 없는 문장으로 할 말을 대신하는 선생님께 아이에 대한 부분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셔도 괜찮다고 진심 어린 얼굴로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보신 이 아이는 수업 태도도 적극적이고 학업 성취도 좋으며 무엇보다 심성이 예쁘며 모든 면에서 잘하고 있지만, 단 한 가지 교우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유독 앙숙이 된 한 친구가 있는데 갈수록 앙금이 쌓여 싸움의 강도가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OO이가 벌게진 얼굴로 날카로운 말투와 커다란 목청으로 모진 말을 내지르면 주변의 여자친구들은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릴 정도라고. 그나마 지금은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남아 있지만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더 심해질 수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 친구와의 문제만 심각한 건가요?”


“그 친구와의 문제는 특별히 심한 편이라 예의주시하고 있고 다음 학년 반 배정 때에도 같은 반이 되지 않도록 반영할 계획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과도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반 아이들이 OO이에 대한 민원을 가장 많이 제기하니까요..

사실 저희 반에서 교우 관계에 가장 문제가 있는 친구죠.”


교우관계에 가장 문제가 있는 친구라는 말에 순간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


사실 OO이는 어릴 때부터 키우기 쉬운 아이는 아니었다. 잠시라도 아이를 겪어 본 어른들은 “어휴~ 얘 보통이 아니네요~ 잘 키우셔야겠어요~”라고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한 살 터울 밖에 지지 않는데도 동생과 함께 키우다 보니 어릴 때부터 혼나는 일이 많기도 했다. 그래도 집 안에서나 지지고 볶았지 초등학교는 나름 자기 사회생활이라고 잘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차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고 편해지면서 아이의 문제 행동이 학교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어쩌면 터질 게 터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지금인 것이다.

엄마가 다시 일을 하겠다고 조금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한 지금.

그리고 이 아이가 가장 바라는 점은 ‘엄마가 9시 전에는 집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 심리상담센터를 찾아가 보시는 것도 권해드려요. 어쩌면 아이 마음속에 깊은 응어리가 있을 수도 있고, 아이와 엄마의 기질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저희는 관찰자일 뿐이니까요.”


선생님은 ‘어쨌든 저희는 관찰자일 뿐이니까요.’라는 말로 이야기의 매듭을 지었다.

마침 이 때는 금쪽이의 문제를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전가시키는 일부 정신머리 없는 학부모들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 되었던 시기였다. 더 이상 선생님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힘 없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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