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초 Mar 03. 2019

살림을 다시 생각해 보는 날

20181220 

떡을 해 오겠다고 B님이 단체 톡방에 글을 올렸을 때 '떡은 뭐하러? 힘들고 번거로울 텐데...'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먹느라 괜히 운동 시간만 줄어드는 것 아닐까를 염려했다.  

나의 예상과 달리 B님은 운동을 다 마치고 떡 보자기를 풀었다. 목이 막힐까 봐 직접 담그신 물김치와 귤도 챙겨 오셨다. 종이컵도 사람 숫자만큼, 나무젓가락도 하얀 봉투에 담아서 가지런히, 장독 뚜껑처럼 생긴 오목한 나무 그릇에 아침에 찐 호박고지 떡을 담아 보자기에 싸 오셨다. 

아침에 찔 수 있게 어제 미리 재료 손질을 다 해두었고, 수업이 끝나고 바로 먹을 수 있게 시간 계산을 해서 찌셨다고 한다. 

떡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온갖 콩들이 보석처럼 박힌, 말린 호박과 대추의 붉은색이 너무 예쁜 이 떡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활발하게 얘기를 잘하시는 다른 어르신 한 분은 1리터짜리 페트병에 식혜를 담아 오셨다. 전에 살던 동네에 일부러 가셔서 식혜를 사 오셨다고 한다.  

가족들끼리나 먹을 법한 귀한 음식을 대하니 처음엔 살짝 부담스러웠고 내가 이런 음식을 나눠 먹을 만큼 이분들과 친밀한가를 속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나를 뺀 나머지 분들이야 2년째 같이 운동을 해 오신 분들이지만 나는 같은 동네 주민이라고 해도 서로 마주친 적 없었고, 이제 겨우 석 달째 같이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나는 운동 외엔 어떤 교류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동안 밥 먹는 자리도 피하고 운동만 해 왔다.  

그래도 준비하신 두 분의 정성이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해서 신문지를 펴 놓은 GX룸의 마룻바닥에 나도 같이 주저앉았다.  

평소 좋아하지 않던 떡과 식혜를 먹었다. 좋아하지 않았지만 맛있었고,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만드는 방법만큼은 배우고 싶게 만드는 맛이었다.  

누군가 물김치의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하면 다른 누군가가 또 자신의 노하우를 공개하면서 듣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레시피를 경청하게 되었다. 떡을 먹으면서 떡 만드는 과정을, 물김치를 먹으면서 물김치 담는 방법을, 식혜를 먹으면서 맛있는 식혜 구입처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쏟아져 나왔다.  

살림을 저평가하는 시각이 곤란한 것이지 살림 그 자체는 매우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다. 음식 하나에도 계절을, 자연의 섭리를 담을 줄 알고, 돈을 주고 사 먹는 행위에도 살림하는 사람의 철학이 담겨있다는 것을... 편의점 음식이나 반조리식품에서는 느끼기 힘든 것들이다. 비록 살림이 이 분들의 젊은 시절을 힘들게 했을 지라도 그것의 위대함을 한 번쯤 눈여겨보고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걱정 가득인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