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혹은 만만하게

노래 일기 마흔일곱

by 솔초

2018. 8. 31

국민학교(내가 다닐 땐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풍금을 전혀 못 치셨다. 한 손으로라도 치실 법한데 풍금 근처엔 가지도 않으셨고,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시간표에 적힌 대로 음악수업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신 우리 반에 딱 한 명, 피아노를 잘 치던 아이에게 대신 반주를 맡기셨다.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따고 다니던 Y라는 친구였는데, 어찌 된 게 Y는 한 번도 기분 좋게 나와서 반주를 한 적이 없었다. 싫다고 입을 삐죽삐죽 내밀거나 있는 대로 선생님 애를 태우다가 마지못해 나와서 반주를 하거나 했다. 좋은데 괜히 빼는 것이 아니라, Y가 정말로 반주하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피아노방(그땐 학원이라는 말보단 피아노방이라는 말을 썼던 것 같다.)에서도 치고 집에서도 치는데, 내가 학교에서까지 쳐야 해?’ 하는 표정이었다. 내 자리에 앉아 선생님과 Y의 실랑이를 지켜보면서 오늘 음악수업은 어떻게 될까, 혹시 자습을 하게 되려나? 노래를 배울 수는 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게 생각이 난다.


대부분의 경우, Y가 나와서 치기는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이 노래를 3번쯤 부를 계획이었다고 해도, Y가 두 번만 치고 자리로 획 들어가 버리면 노래 부르기는 그걸로 끝이거나 아니면 음정도 덜 익힌 상태에서 무반주로 불러야 했다. 그때 선생님의 난감해하시던 표정 ㅜㅜ 배우던 음악교과서의 노래들이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어떤 곡은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채 끝나버리기도 했다.


이 일은 내게 두 가지 면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음악이 권력이 될 수도 있구나! 선생님께 ‘싫어요.’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도 있구나! (그때까진 선생님을 이길 생각을 하지 않던 아이였다.)

피아노에 대한 내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기억이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나는 처음 바이엘 1권을 배우기 시작했다. 꼭 ‘Y의 반주 사건’ 때문만은 아니라, 피아노는 사는 동안 꼭 한번 배워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였다. 출산 후 석 달쯤 지나고, 학원에 다시 나와 바이엘 3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와서 배울 때도 있었고, 학원 원장이 열쇠를 맡겨서 - 여건이 안 되는데 배우려는 내게 원장은 특별히 학원 열쇠를 숨겨놓는 화분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덕분에 10개월 남짓 되는 기간 동안 학원에 있는 피아노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 아이가 깨기 전 이른 아침에 30분씩 학원에 나와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여름엔 동네 사람들 깰까 봐 창문도 열지 않고 연습을 했다. 계속 학원의 피아노를 쓰기가 미안해서 중고 피아노를 샀고, ‘곰 세 마리’ 등의 동요만 2,3년 정도 치면서 손가락의 감각만 유지하던 기간도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시 학원에 나와 체르니 100번을 배웠다.

오른손 따로, 왼손 따로 칠 때는 건반의 위치와 손가락의 흐름을 익히고, 손가락 번호를 익히고, 악보를 읽으면서 동시에 건반을 누르는 연습을 한다는 느낌이 더 컸다. 피아노를 배우면서도 ‘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옆방에서 들리는 고수들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부러웠고, 초중고를 보내면서 만난 피아노를 잘 치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바이엘 어디쯤에선가 처음 양손으로 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양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순간, 어떤 비밀스러운 힘이라도 얻은 것처럼 짜릿했던 기억... 지금까지는 ‘배운다.’는 느낌이었다면, 단순한 멜로디여도 양손으로 치기 시작하자 비로소 ‘친다, 연주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손으로 칠 땐 그냥 ‘평범한 소리’였던 것이, 양손이 만나면서 ‘비로소 음악이 돼’는 느낌이랄까? 이런 느낌 때문에 사람들이 피아노를, 악기를 배우는 걸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만들어진 곡을 치는 것이지만, 내가 소리를 만들어낸다고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서도민요를 시작한 지 1년 하고도 3개월쯤 지난 오늘, 처음으로 ‘이제, 흥얼거리면서 연습을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동안은 한 번을 해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배에 힘을 주고, 자세도 바르게 하고, 큰 소리로 부르라고, 작게 흥얼거리면 독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지금 배우고 있는 곡들에서 구사해야 할 테크닉들을 (되지 않더라도) 알고 있으니 이제 흥얼거리면서 가볍게 연습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지금은 노래를, 음악을 익숙하게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테크닉을 연습하고 싶을 땐 큰 소리로 에너지를 제대로 써 가면서 하되, 노래를 몸에 익게 하고 싶을 땐 작게 흥얼거려도 괜찮다고^^


지금까지 노래 연습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온 집안의 문을 닫고 환풍기와 TV를 트는 것이었다. 최대한 내 소리를 막고 은폐하기 위함이다.

흥얼거려도 된다는 말에 큰 짐 하나를 내려놓은 기분이 든다. 혹은 내 앞에 있던 문 하나가 열려서 다음 단계로 레벨 업이 되는 기분^^

그동안은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연습을 한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한 손으로 피아노를 더듬더듬 치면서 건반의 위치와 손가락 번호를, 악보를 익힐 때처럼 말이다.

비로소 서도민요가 일상으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이제, 연습보다 노래를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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