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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초 Feb 06. 2019

부모님의 마음을 푼 날

20190206

보자기를 풀어보니 사과 7개, 반쯤 얼린 쑥떡 한 봉지, 엄마가 담그신 미나리김치와 파김치가 처음부터 하나의 선물세트였던 것처럼 가지런하게 들어 있다.

죽집 포장용기와 집에서 쓰시던 밀폐용기에 엄마의 미나리김치와 파김치를 각각 담고, 언니가 선물한 김부각 상자를 재사용해 사과와 같이 담은 뒤 굴비 살 때 딸려 온 분홍 보자기로 예쁘게 싸신 것이다.


아버지의 선물을 받을 때면 어쩌면 이렇게 내용물의 크기와 양에 딱 맞는 상자와 보자기를 찾아내서 포장을 하실까 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때그때 주문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내용물과 재사용하는 포장재들이 잘 맞는 데다, 상자의 크기와 모양에 맞게 물건 배치도 적절하게 해내시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무심코 상자를 열고, 순식간에 정리하고, 재활용을 해버렸다. 빨리 정리하고 쉬는 것이 합리적인 양, 부지런한 것인 양 집에 오자마자 상자를 해체했다. 선물을 음미했어야 하는 건데 어리석게 내용물만 보았고, 먹기 바빴다. 

맛있게 먹었다는 감사전화가 전부가 아닌 것을... 


보자기에 싸인 겉모습만큼이나 열었을 때의 가지런한 모습에서 아버지의 감각을 더 많이 느낄 수가 있는데 오늘도 후다닥 짐 정리를 해버려서 사진도 기억도 없다.


지금까지 딸들에게 음식을 싸주실 때면 엄마랑 다투실 때가 많았는데, 그 대부분의 이유가 두 분의 포장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포장용기, 상자, 보자기의 크기와 종류 등을 두고 두 분은 디베이트에 나온 토론자들처럼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의 주장을 펼치셨는데,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적당히 두 분 중의 한 분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드리곤 했다.


딸들에게 줄 음식을 포장하시는 동안의 아버지는 아티스트였다. 정리정돈 잘하시는 깔끔한 성품처럼 음식도 가지런히 넣으셨고, 공간이 없어 쑤셔 넣어야 하는 순간에도 최대한 지저분해 보이지 않도록 마무리를 말끔하게 하셨다. 마음에 들 때까지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시면서 배치를 하시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재사용의 대가이시다. 베란다 가득 쌓아두신 종이상자와 스티로폼, 쇼핑백, 포장용기들은 아버지 작품의 재료가 되어 명절 때, 김장 때 다시 나를 포함한 딸들에게로 전해진다.


마음에 드시는 보자기로 싸는 것까지 하시고 나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신 듯 뿌듯해하신다. 깊은 집중 후에 찾아오는 피로감을 즐기시면서 다음에 쓸 상자와 용기 등을 정리하실 때의 아버지의 모습은 장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또 하나의 선물이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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