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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초 Jan 28. 2019

이 또한 삶의 일부인 날

20190128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오늘은 아이 학교의 개학식. 35분 단축수업으로 평소보다 1시간 정도 빨리 귀가했으며 금요일은 다시 종업식인데도 아이는 오랜만에 하는 학교생활이 힘들게 느껴졌나 보다. 


"뭐 했길래? 진도 다 끝났을 거고... 영화 봤어?"

"고교입시 설명회 뭐, 그런 거 했어..."


'왜 이러고'에 해당하는 일들이 어떤 일들인지 알 것 같다. 고교 입시 설명회이지만 아이에겐 대입설명회처럼 다가온 듯하다. 그래서 힘들었구나~ 


“나 엄마랑 차라리 (역할) 바꾸고 싶어.”

“그러냐?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엄마도 노래, 운동, 일기 빼면 다 하기 싫은 일 투성인데..." 


물론 보람 있는 일이 두어 개쯤은 있다.

아이가 먹을 반찬 만들기, 아이의 공부 봐주기 정도? 


그 외엔 하고 싶지도 않고, 하기 힘들기도 귀찮기도 하지만,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장보고 음식 만들기. 

표현은 간단하지만 포장비닐 혹은 플라스틱 용기를 벗겨낸 뒤 씻고 먹기 좋은 상태로 조리하고 조리 과정에서 생기는 쓰레기들을 수시로 정리하는 일도 포함한다. 먹은 다음에는 남은 음식을 보관 혹은 버린 뒤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 후에는 거름망에 남은 음식찌꺼기를 모아서 음식쓰레기로 버린다. 이 밖에 재활용 쓰레기와 매립용 쓰레기도 수시로 버린다. 


가장 하기 싫은 것 중의 하나, 욕실 청소하기. 

세면대, 변기 욕조, 바닥, 거울 부분별로 하고 2~3일에 한 번씩은 욕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새 비닐봉지로 교체해야 한다. 가끔 문화센터 화장실보다 우리 집 화장실이 더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땐 그분은 전문직업인이고 나는 아마추어니까 하고 위로할 때도 있다. 세면대에 분홍색 물 때가 끼기 시작하면 청소할 때가 됐구나 생각하게 된다. 

랑지 똥 치우기와 적절한 시점에 배변 패드 갈아주기, 

끝나고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어서 분리수거나 지저분한 일을 처리할 때 세트로 묶어 처리한다. 랑지 산책 이후에 랑지의 발 닦아주고 사료 채워주고 물 채워주기. 

이밖에도 손을 씻거나 용변 보러 들어갈 때 욕실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고 머리카락이나 기타 이물질이 보이면 그 즉시 치워주기. 주 2회 과외선생님, 1회 민요 선생님이 오는 날은 수건이나 욕실 전체의 위생 상태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세탁물의 종류 혹은 색깔, 용도 별로 적당량이 모였을 때 세탁기 돌리기. 

기계가 대신해주니 편할 것 같지만 분류하고 돌리고 널고 다시 정리해야 비로소 끝이 나는 일이며, 가끔 아이 교복 셔츠에 묻은 음식 얼룩이나 가방 안에서 터진 귤의 흔적 같은 것은 기계가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해야 한다.


학기 중에는 교복 셔츠와 바지의 개수에 따라, 또 아이가 교복을 입은 채로 축구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어느 요일에 몰아서 세탁하는 것이 나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축구는 안 했지만 청소당번이라거나 기타 다른 사정으로 인해 한눈에 봐도 교복이 뿌옇게 보일 때 등 특수한 사정에 따라 교복의 세탁 일정도 조정해야 한다.


하루 2번 환기하고 청소기 1번 이상 돌리고 체력이 허락할 때 물걸레질 하기. 4개의 방과 거실의 창을 열고 닫고, 미세먼지가 심할 땐 자동환기시스템을 작동시키고, 랑지의 털 뭉치가 보일 땐 수시로 치우고 청소기의 먼지주머니도 주 1회 정도 비우고, 아이방의 공기청정기도 작동시키고, 모든 책상, 테이블, 식탁, 선반, 책꽂이 등등 먼지가 내려앉을 수 있는 빈 공간의 먼지를 제거하고...


지금까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10분의 1도 쓰지 않았지만 이것을 다 쓰는 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적어야겠다. 


새삼 나의 일상이 온갖 허드렛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할 수 없는 일, 다른 창조적인 일들을 하기 위한 시작인 일, 우리의 몸이 순환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렇듯 순환하는구나, 이것도 삶의 과정이구나...


지금은 내가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자기 삶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일들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삶의 배설물들을 치우는 일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해보지 않고 가르치지 않으면 누군가가 해주길 바라게 되는 일들이 되어 버린다.


우리 어머니가 가르치지 않았던 남편에게 삶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을 수시로 가르치고, 곧 어른이 될 나의 아이도 수시로 가르친다. 아이들이 배우는 기술 가정 교과서에 집안일을 처리하는 구체적이고 세밀한 내용이 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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