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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Sep 29. 2020

<소설보다 가을, 2020>

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둥그레진 보름달과 선선한 바람이 완연한 가을이네요. 여러분은 다가온 가을을 어떻게 느끼고 계신 가요? 전례 없이 장기화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나들이를 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요즘, 방구석에서 가을의 정취를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한 <소설보다 가을:2020>입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는 2018년부터 계절 별로 <소설보다>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데요, 젊은 작가들의 3권에서 5권의 단편 소설을 ‘이 계절의 소설’로 선정한 뒤 그것들을 묶어서 분기별로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형태입니다. 저는 우연히 <소설보다 겨울:2018>을 읽게 된 뒤, 해당 계절과 시대를 반영하는 단편들에 매료되어 그 뒤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문학과 지성사의 <소설보다> 시리즈 출간을 기다리게 되었답니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보다 가을:2020>은 서장원 작가님의 ‘이 인용 게임’, 신종원 작가님의 ‘멜로디 웹 텍스처’ 그리고 우다영 작가님의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총 세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오늘은 그중 인상 깊게 읽었던 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볼 게요. 

1.     이 인용 게임

이 인용 게임은 ‘나’의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은 ‘노영’인 것처럼 보입니다. 유학 시절 노영을 알게 된 이야기부터 노영의 과거, 현재까지 ‘나’의 입을 빌려 조망하거든요. 함께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님은 일부러 이러한 형태를 취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노영이 노영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나’의 시선을 통해 노영을 봄으로써 독자들이 그녀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도록 말이에요. 저는 이 인터뷰가 <이 인용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설명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이 인용 게임>을 다 읽고 나자, 누군가의 삶과 선택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재단할 수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거든요. 여러분도 이러한 감정을 함께 느끼실 수 있도록 노영과 ‘나’의 이야기를 공유해볼 게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통에 일기장을 먼저 던져버린 뒤 먹다 남은 감자튀김을 쏟아부었다.” (소설 특성상 사진을 찾기가 힘들어서, 사진 대신 문단을 나누고 강조할 만한 용도로 문단의 주제나 요약이 될 만한 문장을 적었습니다ㅠ) 

노영은 두 가지를 훔치고, 노영과 ‘나’는 그렇게 각자 자기 손에 들어온 누군가의 ‘기억’을 무감하게 흘려보냅니다. 노영이 첫 번째로 훔친 것은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 묵게 된 집주인 아들의 일기장입니다. 집주인이 열악한 방에 추가금을 요구하고 노영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며 합의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자, 그녀의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더 값나가는 것을 훔쳐 왔어야지.’ 하고 말하지만, 집주인에게 이는 그 무엇보다 값진 물건입니다. 아들의 일기장은 그녀가 전사한 아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수단이었거든요. 이후 그 일기장은 노영과 함께 지내게 된 ‘나’의 손에 들어오는데요, ‘나’는 집주인의 이 기억을 돌려주려고 노영이 도망쳐 나온 집으로 찾아갑니다. 하지만 일기장은 집주인의 손이 아닌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낯선 이에게 일기장을 돌려주기 위해 찾아간 ‘나’를 집주인이 아시안이란 이유만으로 도둑 취급했거든요. 얼마 전 한국인 도둑이 들었다며, ‘나’가 자기 집 앞에 어슬렁 거리는 이유를 추궁합니다. 당황한 ‘나’는 길을 잃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고, 그렇게 집주인은 아들의 일기장을 되찾지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내가 팔았어. 하나씩 하나씩”

노영이 두 번째로 훔친 것은 죽은 오빠의 보드게임입니다. 노영의 오빠는 소아암을 앓다가 병사했는데, 보드게임은 오랜 입원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그녀의 어머니가 오빠에게 사다 준 것들이었습니다. 노영의 오빠와 어머니가 즐기던 보드게임은 주로 이 인용 게임이었습니다. 노영이 절대 참여할 수 없었지요. 어머니가 아픈 오빠의 곁을 머물고, 아버지가 퇴근 후 병실에서 아들을 보는 내내 가족의 시야 밖에 있던 노영은 환자의 가족이 해야 하는 그 밖의 몫을 수행합니다. 세탁실에서 빨래를 하고 병원에 상주하는 어머니에게 옷이나 반찬을 가져다주는 일, 오빠의 보양식을 위해 아무리 먼 곳이라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달려가는 것 같은 일을 말입니다. 그리고 오빠가 죽은 뒤, 어린 노영은 트렁크 한가득 쌓인 보드게임을 하나 둘 어머니 몰래 중고품으로 팔아버립니다. 


“소설을 통해 어떤 말을 할 때, 모든 말하기가 그렇듯 그 말이 수용자를 염두에 둔, 유의미한 발화이기 때문입니다. -책 中 서장원 작가 인터뷰”

노영과 ‘나’는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을 훔치고 팔아버립니다. 이는 집주인과 노영의 어머니에게 큰 상처였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들의 복수를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아픈 형제에 가려져 가족에게 배제되어 있던, 이인용 게임에 절대로 참여할 수 없던 노영에게도 그 보드게임이 아름다운 기억이었을까요? 아마 어린 시절 외면당한 차가운 기억에 가까웠을 겁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일기장은 그저 외설적인 그림과 오래된 노래의 목록에 불과했고, 선의를 베풀으려다가 괜히 모욕을 겪게 된 원흉입니다. 이를 통해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감한 물건, 혹은 그보다 더 상처를 안겨주는 매개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기장과 보드게임이 사라지는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만든 ‘나’와 노영의 행동을 타자인 제가 단편적인 잣대로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노영이 오빠의 보드게임을 모두 팔아버린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오빠와 닮은 ‘나’를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 데려가 다시 보드게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모두에게는 각각의 인생과 사정이 존재하니까요. 작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알려준 채, 우리에게 결론을 맡기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요. 지금까지 상반된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기억을 타자의 시선으로 훔쳐보는 <이 인용 게임>이었습니다. 


2.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우다영 작가님의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기독교 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제목과 다르게 불교의 윤회를 큰 스토리 틀로 삼은 작품입니다. 판타지 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나’와 ‘너’, 그리고 그를 넘어선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돋보입니다. 이야기에는 ‘각성자’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연이은 윤회의 모든 생을 알게 된 이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각성자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아즈깔’이라는 풀이 있는데요, 아즈깔은 힌디어로 오늘을 뜻하는 아즈와 어제와 내일을 뜻하는 깔이 합쳐진 이름입니다. 아무런 유전적 전승이나 호르몬 교류 없이 같은 종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풀입니다. 오늘과 어제, 내일을 모두 알고 있는 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풀에서 시작된 감염과 전염으로 세상에는 이생과 전생, 그리고 그 전생까지 모든 삶을 기억하는 ‘각성자’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그들의 영혼은 이전의 생에서의 모든 사건과 감정, 능력을 기억해 고도로 발달된 지식과 인지능력을 보입니다. 이러한 각성자들을 연구하는 ‘나’는 이들이 수많은 생을 반복하면서 축적된 감정과 발달된 인지능력 때문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가 흐릿해진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생을 반복하며 수많은 인연을 만나고 그들과 감정을 나누고 그것이 반복되고 송신과 수신이 뒤바뀌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어 다른 개체를 동일시하는 고도로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는 존재임을 알아차립니다. 

“어제와 내일은 다르지 않아요. 과거도 미래도 모두 지금이 아닌 나머지 시간일 뿐이죠.”


저는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을 읽으며 어쩐지 답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경험과 가능성의 축적으로, 풀 ’아즈깔’처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모든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이타성을 띄는 자각자들이 과연 우리와 많이 다른 걸까요? 물론 우리는 그들과 달리 오늘만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처럼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타적인 마음을 기반으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는 자각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선한 마음을 기반으로 한 행동도 때로는 인과관계에 의해 악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모든 걸 초연한 것처럼 있는 그들에게서 외로운 하나의 섬 같은 우리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쉽게 ‘나’라고 명명한 경계 안의 ‘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나의 생을 유지하고 나의 활동에 포함되는 모든 것을 ‘나’라고 여길 때, 언제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었어요. -책 중 우다영 작가 인터뷰

이러한 혼란은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자 정리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기억이 축적된 것이 누군가의 인생이고, 그 인생을 성립하는 기억이 생기는 모든 과정에서는 나와 감정을 나누고 사건을 나누는 타인이 존재합니다. 소설은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각성 자라는 매일을 반복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를 통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나’라는 하나의 사람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너’, 그리고 그를 넘어선 ‘우리’의 일부이고 모두는 아즈깔 풀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에서 말하고 있는 이 기억은 <이 인용 게임>에서 말하고 있는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 감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그 감정 또한 각기 다른 기억의 일부로 자리 잡습니다. 지금까지 기억을 기반으로 ‘나’와 ‘너’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돋보이는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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