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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Oct 06. 2020

오늘의 젊은 작가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말이 목 끝에 걸려 나오지 않으셨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고민해 노트에 적어보고 수도 없이 되뇌어 연습하며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입 속에서 굴려본 말들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경험을 가지고 계신가요? 민첩한 순발력을 타고난 달변가가 아니고서야 이 글을 읽으시는 모두가 이러한 경험을 겪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발표에 긴장이 되어서, 또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한 말이라서, 혹은 익숙하지 않은 언어라서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애써 꺼낸 말을 더듬어보셨을 것입니다. 정용준 작가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아니고, 상처를 줄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낯선 언어도 아니지만 혀 끝에 걸린 말을 꺼내기 어려운 열네 살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에 걸린 말들을 뱉어내고 싶지만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마음과 몸에 기대와 절망을 반복하다가,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다니면서 각각의 언어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오늘은 이 독특한 언어 교정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말과 생각에 힘을 실어가는 소년의 이야기인 <내가 말하고 있잖아>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1. “잘해 주기만 하면 돌멩이도 사랑하는 바보였지. 하지만 열네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 

‘나’는 항상 마음이 구석에 몰려있는 소년입니다. 바짝 곤두서서 애정을 갈구하다가 ‘나’에게 손을 내민 이들에게 전부를 내밀어 안기려다 상처 받기를 반복합니다. 그는 다정한 친절과 사소한 배려를 보이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엄마와 친구를 비롯해서 그에게 상냥했던 사람들은 전부 끝까지 웃어주지 않습니다. 말더듬증을 이유로 괴롭히는 아이들을 막아주었던 친구는 떠나버렸고, 어쩐 일인지 따뜻한 제육볶음을 만들어준 엄마는 ‘나’를 때렸던 남자와의 만남을 이어갑니다. 계속해서 반송되는 애정에 지친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일기장을 벗 삼아 자신에게 말합니다. “나는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 속지 않겠다.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내 편은 아무도 없어.” 하고 말이에요.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싫어하기 시작한 ‘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언어 교정원 원장의 따뜻한 위로와 같은 반 수강생들을 속으로 부러 깎아내리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줄줄 흐를 것만 같은 눈물을 잇새로 꾹 참을 정도로 여전히 사랑을 원하면서도요.


 2. “그렇다면 더더욱 24번이라고 해야겠네.”

그런데 ‘나’가 단단히 결심하고 들어간 ‘스프링 언어 교육원’은 조금 요상한 형태입니다. 이전에 다녔던 곳과는 달리, 말을 더듬는다고 강압적으로 굴거나 될 때까지 그를 몰아세우지도 않습니다. 원장은 노트 한 권을 주며 그가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 문장, 그리고 마음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쓰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나’의 노트를 꼼꼼히 읽어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새로운 이름으로 지어줍니다. ‘나’의 이름은 그가 다니는 중학교 이름 ‘무연’이었다가, ‘엄마’였다가, 지문을 낭독하는 국어 시간마다 끔찍이 불리던 출석번호 ‘24번’이기도 합니다. 스프링의 모든 수강생들은 이런 식으로 각자의 이름을 가지는데, ‘루트’라던가 ‘핑퐁’, 혹은 ‘모티프’처럼 각자가 집착하고 있거나 두려워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단어로 불립니다. 남들에게 이름으로 불리면서 반복되고, 익숙해지고, 단어가 가진 부정적 의미나 어려움 위에 새로운 기억이 충분히 덧씌워질 때까지 노트에 가득 채워진 단어들로 불리는 것입니다. ‘나’의 말더듬증을 고쳐주겠다는 핑계로 수업시간마다 그를 일으켜 세워 제대로 읽을 때까지 낭독을 시키는 고집스러운 국어교사에 의해, 24번이라는 호칭은 ‘나’에게 상처 그 자체였습니다.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고 더듬는 자신의 목소리, 끝내 낭독을 포기한 교실에 맴도는 정적과 아이들의 비웃는듯한 작은 웃음소리, 그리고 교사의 미묘한 시선 따위로 가득 찬 단어였던 거예요. 하지만 스프링 원장의 지도 아래 수강생들과 함께 말더듬증을 고치기 위한 여러 가지 과제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24번은 더 이상 상처로 가득한 호칭이 아니게 됩니다. 24번은 이제 루트, 하이와 함께 밀크셰이크를 마시며 국어 선생 복수 계획을 짜고, 탁구를 칠 줄 알고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인사말 하며 전단지를 나눠줄 수 있는 경험으로 가득 찬 단어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다.  


    3. “노트를 펼쳐서 뭐든 써. 그러면 금방 마음이 편안해진단다.”

누군가 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거나 심지어 당연하기까지 한 일들을 조금은 버겁게 수행해내는 과정에서, ‘나’는 원장이 건네준 노트의 도움을 톡톡히 받습니다. 말하기 어려운 표현과 단어를 적기 시작한 노트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나’의 마음속 생각을 전부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갑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동시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상처를 안겨 주는 엄마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 그리고 증오 혹은 분노로 가득 찬 감정만 남은 엄마의 애인과 국어 교사에 대한 솔직한 내면을 전부 노트에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는 말을 더듬는 것이 싫어 입을 다물었고,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노트에 하지 못한 말들을 적어가면서, ‘나’는 그만의 언어를 되찾아가고 있었고, 단순히 일기를 쓰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과 그가 느낀 감정들을 소설 형태로 써보기 시작합니다. 내면의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다른 방향인 언어의 고민을 시작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상처 주는 일을 그만두고 스프링 수강생들과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특정 사건을 계기로 마주한 그들의 따스한 지지와 엄마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나’는 혼자 있는 공간에서 매끄럽게 말하던 것처럼 그만의 언어를 구사하게 됩니다. 글과 말의 유사성을 알게 되면서 각각의 언어가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를 이룬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을 내뱉지 못하고 더듬게 되는 ’나’의 모습은 사실 수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그로 인해 신체적, 심리적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십 대 소년을 통해 ‘말을 더듬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를 표현하는 수단의 일종입니다. 중학생의 눈에 어른으로 보이는 우리에게도 ‘말을 더듬는’ 것처럼 각자 숨겨두고 있는 상처가 하나씩 있잖아요. 유년 시절 보상받지 못한 사랑일 수도 있고, 미처 들어주지 못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스스로를 계속 다짐시키는 ‘나’에게 깊이 공감했답니다. 사람에게 크게 상처 받은 뒤, ‘다시는 마음을 주지 말아야지,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고 말도 안 되는 결심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말하고 있잖아>에서 ‘나’가 더 이상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고 자신의 언어를 찾아낸 계기가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서 한 경험과 교류였던 것처럼, 저 또한 다른 사람의 따뜻한 지지와 응원으로 ‘나’처럼 말을 더듬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요. 여러분이 말을 더듬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그 기억과 경험이 책 속의 ‘나’와 비슷하진 않은가요? 말할 준비가 되어있고 마찬가지로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 만났을 때 더 이상 언어를 잃지 않는, <내가 말하고 있잖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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