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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an 13. 2024

무에타이를 못해도 괜찮아

#치앙마이 일년살기

무에타이를 처음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 푸켓에서 1회 시합 경험, 현재 치앙마이에서 5개월째 무에타이 수업 참여 중.


나는 무에타이를 썩 잘 하는 편은 아니다.


킥이나 펀치 같은 단순한 공격은 곧잘 하고 힘도 좋은 편이라 태국인 코치들마저 감탄하고는 하지만 응용 편으로 넘어가면 그들의 감탄은 이내 한숨으로 바뀌고는 한다.


상대가 오른쪽 손으로 공격하면 나는 어떤 손이나 발을 들어서 방어하고 그다음에는 어떤 공격을 곧바로 연결하고 등등. 방향이 들어가는 문제에서는 항상 고전한다. 센스도 없고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만 한다. 콤비네이션 기술을 알려줘도 매우 금방 까먹어버린다.


상대의 킥 공격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넘어뜨리는 기술을 알려주는 코치들. 이런 움직임은 수백 가지가 넘고 이걸 다 알고 싸우는 선수들은 매우 똑똑한 사람들인 것...


내가 머리가 썩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무에타이를 하면서 다시금 크게 깨닫는 중이다. (수많은 기술을 익히고 머릿속으로 온갖 수싸움을 하며 싸우는 프로 격투기 선수들은 정말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다)


머리가 나쁘면 근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다. 코치와 함께 연습을 하다가 코치의 지시를 따라가지 못하겠으면 금방 멈추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때 종종 코치는 '멈추지 말고 뭐라도 해라'라고 말한다. 실제 시합에서 누가 멈추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나고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것이 실제의 나의 삶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적당히 잘하지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학창 시절 성적은 100점 만점이라면 90점대 초반을 유지했고 단 한 번도 95점 이상을 넘어본 적은 없다. 할 줄 아는 건 꽤나 많은데 '잘한다'라고 이력서에 적을만한 스킬은 없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우면 포기하는 빈도가 더 높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나는 실패의 스트레스를 잘 견디지 못한다. 실패에 집착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지겹게도 유년시절의 이야기지만 자라온 환경이 실패가 용납되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빠에 대한 인생 최초의 기억은 밥상을 엎는 모습이었다.


나랑 동생이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한다고 그랬던 것 같다.


젓가락질을 못해도 괜찮다 포기하지 말고 잘해봐라, 이런 격려 같은 건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혼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걸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 결과 어지간해서는 내가 못 하는 건 없었다. 공부까지도 곧잘 했고 대학교도 수시 입시 전형을 위한 비용만 받아서 알아서 전형을 진행했다. 논술학원은 비싸니까 책 한 권을 사서 공부해서 수시에 붙었다. 물론 잘한다는 칭찬과 격려는 없었고 못 했을 때의 비난만 받았다. 잘하면 아빠 덕분, 못 하면 니탓.


이 때도 나는 여전히 응용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의욕에 불타오른 적이 없다. 혼나지 않는 것이 목적인데 그것만 달성할 정도만 되면 되지 뭘 또 더 어려운 문제에 도전한단 말인가. 외워서 풀면 성적이 잘 나오는 내신성적을 중요하게 보는 수시전형이 있었기에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이후로도 내가 못 하겠다 싶은 어려운 문제는 금방 포기하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더 궁극적으로는 이루고 싶은 삶의 목표가 없었다.


딱히 정말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사회에서는 특히 면접 자리에서는 내가 의욕에 넘치는 훌륭한 사람인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은 항상 큰 스트레스였다.


다시 무에타이 이야기로 돌아가서. 무에타이를 잘 하지 못함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음에도 무에타이에 대한 애정전선에는 이상이 없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무에타이가 좋아졌다. 이제야 비로소 남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에타이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래의 두 가지 정도의 목표만 갖고 무에타이를 즐기며 하는 중이다.


첫 번째 목표는 하루 12분간 진행되는 코치와의 1:1 훈련을 크게 지치지 않고 해내는 것이다. 태국의 무에타이 수업에서는 일반적으로 3분 X 4라운드 총 12분 간 코치들과 1:1로 무에타이 기술훈련을 하게 된다. (가끔 여유로우면 코치들이 5라운드를 진행하기도 함) 이것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힘들다. 크로스핏을 1년 정도 했었는데 크로스핏 보다도 무에타이 1:1 훈련이 훨씬 더 힘들다.


지금은 12분이 지나고 나면 녹초가 될 정도로 힘들고 호흡 조절도 잘 되지 않는다. 이건 나만 아는 느낌인데 눈이 풀린 채로 헉헉 거리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할 만하다' 싶을 정도로 체력을 올리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이게 가능해지면 다음 목표는 스파링을 잘 해내는 것이다. 자유롭게 기술을 구사하는 스파링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가 아니라 '어떤 공격을 해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을 높이고 싶다. 아마 2단계까지 마스터하면 치앙마이를 떠날 날이 다가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무에타이는 내가 부모님에게서 얻지 못한 비빌 언덕 같다.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고만 싶을 부모님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닌, 체육관 생각이 먼저 난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가면 태국만큼 훌륭한 무에타이 체육관을 찾기는 어려울 거라 다른 종목으로 갈아타겠지만 현존하는 모든 운동 종목 중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무에타이인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머리가 좋지 않으니 배운 것을 매일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고 하루에 0.2% 정도는 더 나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즐겁다. 


체육관 사람들과의 친목도모도, 예쁜 운동복도, SNS로 자랑하는 것도 다 필요 없다. 내가 스스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그 느낌, 그것이 너무 즐겁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렵다고 중간에 멈춰서는 것도 안 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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