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에게
아빠를 '폭력' 이외의 영역에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어렸을 때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폭력이 너무도 나에게는 존재감이 컸다. 여러모로 아빠에게는 사랑받고 수용받는다는 감정을 느껴본 일이 없다. 아빠라는 거대한 산은 나에게는 장벽 같았고 나는 사회에서도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장벽 앞에서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이 될 뿐이었다.
최근 들어서 우울증에 진이 쏙 빠지고 더 이상은 내 인생에 바닥은 없다고 느낄 무렵. 한 번만 아빠를, 아빠와의 관계를 폭력이라는 사건을 걷어내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아빠로 인해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은 없었던 걸까?
[아빠에게서 받은 긍정적인 영향]
첫 번째. 건강한 신체
샷시 기술자인 아빠는 체력이 받쳐주었기 때문에 그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온몸이 통뼈다. 아마 운동선수를 했어도 뭔가는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체형은 나도 동생도 모두 물려받았다. 나는 심지어 중학생 때 체육 선생님에게 체고 진학을 권유받았던 일도 있었다. 지금도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우며 기력이 조금 딸린다는 것 빼고는 어린 친구들 못지않게 운동을 한다.
두 번째. 생활력
직장생활이 잘 풀린 편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이 딱히 없기도 했고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도 못해서 한 가지 직업을 쭉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먹고살았다. 포기는 없었다. 각종 알바를 찾아서 했고 파견직, 계약직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나는 못하겠다'며 주저앉아 징징거리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아빠와 닮아있는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집안의 그 어떤 지원 없이 혼자서 일 했고 자수성가하여 서울에 자신 소유의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아빠가 한 것은 그저 묵묵히 일하는 것뿐이었다.
세 번째. 손재주
아빠의 직업은 샷시 기술자로 그 외 영역에서도 이것저것 손재주가 좋은 편이다. 아빠가 나에게 뭘 고치는 것을 가르쳐준 적은 없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물건을 고치고 있었다. 노트북 뒤판도 직접 뜯어서 메모리 같은 것들을 교체하기도 하고 전등도 갈고 가구도 리폼하고 별의별 것을 다 할 줄 안다. 아마 남동생 보다 내가 손재주가 더 좋지 않을까. 아빠의 손재주를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고, 직접 고치면 돈을 아낄 수 있으니 돈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성향을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다. 아빠와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면, 평행우주에서의 나는 아빠의 직업을 물려받아서 아빠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기왕 아빠와 관련된 긍정적인 기억을 꺼내보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을 다 적어보도록 하겠다.
[아빠와의 즐거웠던 기억]
첫 번째는 외갓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외갓집이 전라남도의 섬인데 외삼촌 친구분이 배를 태워준다고 해서 엄마를 빼고 아빠, 나, 동생 이렇게 셋이 배를 탔다. 배는 낚싯배였는데 낚싯대 없이 줄로만 하는 낚시를 가르쳐주셔서 신나게 낚시를 했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겁도 없이 배의 난간 위에 서서 낚시 삼매경에 빠졌다. 아직도 어렴풋이 배에서 내려다보았던 맑은 바다가 떠오른다. 너무 맑아서 꼭 동남아 어딘가의 바다를 보는 기분이었다. 물고기가 다니는 것이 물 밖에서 바로 보일 정도였다. 성과도 좋아서 물고기도 꽤 많이 잡았다. 그때 아빠가 배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사실 기억은 안 나는데, 가족이 이런 시간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바보 같은 사람. 어렸을 적에 나랑 동생 데리고 야구장이라도 한 번 가주지. 그럼 절대로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텐데.
두 번째는 아빠가 종종 사 오던 떡볶이다. 아빠는 원래 뭘 사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다. 맛있는 것이 보여서 사 오는 것은 엄마의 몫이고 아빠는 음식 관련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 아빠가 일하던 작업 현장 앞에 유명한 떡볶이 노점이 있는 거라. 뭘 사들고 오지 않는 아빠도 거기서 종종 떡볶이를 사 왔고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그 노점이 위치한 곳 바로 앞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지라 아빠는 종종 떡볶이집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떡볶이는 빨갛다 못해서 살짝 검은 느낌이 날 정도로 진한 고주창 양념이었고 쌀떡을 써서 아주 오통통했다.
세 번째는 고양이와의 일이다. 어쩌다 보니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오게 되었다. '별이'라는 이름의 삼색 고양이다. 별이는 범백 바이러스에 걸려서 생사가 왔다 갔다 했다. 거의 4일인가를 온 가족이 매달려서 2시간에 한 번씩 밥을 먹였고 결국은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다. (이제 한 3살 되었으려나) 별이를 살리는 과정에 아빠가 동참했다는 사실에 처음 놀랐고, 별이에게 준다며 캣타워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고 결국 별이를 쫓아내지 않고 별이랑 같이 산다는 사실에 세 번 놀랐다. 사실 별이에 관한 일은 가족이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다 같이 해본 첫 번째 경험이다. 아마 그건 나 말고도 온 가족이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별이에 관한 기억만큼은 절대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아빠는 종종 '니가 나보다 더 많이 배웠다고 날 무시하는 거냐?!!'와 같은 말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래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나는 항상 억울함에 치를 떨었다. 아빠가 중학교만 졸업했다고 해서, 샷시 기술자라고 해서 한 번도 남에게 험담을 하거나 이를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다.
지금은 학력과 직업이 아빠가 가진 일종의 자격지심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종종 사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의 인맥을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친구를 자랑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 역시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었구나 싶다. 스스로 그것이 부끄러워서 나에게 더 험한 말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대화라는 것을 할 줄 아는 관계였다면, 나는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아빠가 스스로에게 자격 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좋은 대학교를 나와서도 사람들에게 사기치고 위해를 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기업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더 그렇다. 그럴싸한 말로 자신이 기업가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뒤로는 제대로 일도 하지 않고 돈을 벌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노력은 적게 투입하고 매출을 높게 올리는 것이 현명한 비즈니스 방법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매우 싫었다.
그에 비해 아빠는 정당하게 일을 했다. 요즘 보면 인테리어 시공을 해주고 하자가 나도 나 몰라라 하는 업자들이 많은데 아빠는 그렇지 않았다. 아빠는 훌륭한 기술로 훌륭한 결과물을 제공해 주고 그에 맞는 돈을 벌었다. 나는 아빠가 스스로의 직업과 자격에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의 나는 아빠에게 이런 말을 건넬 수 없었지만 많은 사회생활 경험을 쌓은 나는 이제는 이런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와의 안 좋은 기억을 글로 쓰는 것보다는 이번 글을 쓰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결국 세상을 구하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연민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