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에게
어떠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느낌이다.
내 주위로 네모난 금이 그려져 있다. 그냥 바닥에 그러진 금일뿐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넘어가려고 하면 꽤나 강력한, 죽지는 않을 정도지만 강력한 전기가 파바박 하고 내 몸에 내리꽂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네모난 금 안으로 도망친다.
금 밖으로 도망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횟수가 늘어나고 조금은 익숙해지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워서 어떤 사람들은 평생 금안에 머물러 살기를 선택한다.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나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금 밖으로 벗어나는, 부모님이 불러도 집에 가지 않는 행동을 선택했다. 그전에도 여러 반항(?)은 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모님의 말을 거절한 것은 처음이었다.
금 밖으로 나가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건만, 혼돈과 공포 그 자체여서 '나는 존재 자체가 잘못된 사람이야'라는 생각에 실컷 시달려야 했다. 나의 공포를 잠재워 줄 것은 술뿐이라 술에 뇌를 절여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 누워 있는 것으로 공포를 달랬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 가장 비참한 시기였다.
공황발작과 우울증을 겪으며 술을 더 이상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술을 마시는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며 과거의 고통을 다시 되새김질하거나, 대체 부모님은 나에게 왜 그랬을까 와 같은 이유를 곱씹었다. 혹은, 우울증이 심해지며 죽음에 대해 떠올리게 되자 '내가 먼저 죽는다면 적어도 부모님에게 내가 무엇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는지 알릴만한 것이 필요하다'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히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영역을 글로 옮기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가족에 대한 글을 쓰며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금을 그린 사람은 부모님이지만 빠져나가지 못한 것은 나라는 사실이었다.
분명, 금은 부모님이 그렸다. 그냥 그린 것도 아니고 강력하게 그렸다. 금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면 다양한 압박이 뒤따랐다.
나는 그런 압박 앞에서 순종하지도 않았지만 벗어나지도 못했다.
부모님을 붙잡고 내가 왜 힘든 지에 대해 설명이나 설득을 하려고 하지도 못했고 그저 입을 꾹 다물뿐이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문제를 외면하면 할수록 몸은 아팠는데 외면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심장에 누가 화살을 쏜 것처럼 '헉'하고 아픔을 느끼면 그 화를 나 자신에게 풀었다.
도망도 여러 번 갔다. 장기 배낭여행을 두 번이나 갔었다. 인도, 네팔, 캄보디아, 라오스 같은 곳을 갔고 지금 태국에서 머무는 것처럼 10여 년 전에도 태국에 머물며 운동만 하기도 했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는 마음이 편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올 시기가 되면 극도의 불안감과 불면증을 겪었다. 잠을 자려고 8시부터 누워도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나는 부모님이, 부모님의 시선이 숨 막혔다.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기도 했다. 이게 무슨 모순 덩어리란 말인가.
얼마 전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라는 분류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내가 '금'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냥 내가 금이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내가 지워버리면 되지 않나?!!
다시 금이 있다고 가정하고, 나는 이 금에서 벗어나려면 부모님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아니면 내가 바뀌어야 할까? 사실 그것도 아니지 않을까?
분명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기는 했지만 나는 잘 성장했고 세상에 폐를 끼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많은 곳을 여행하기도 했고 일도 열심히 했다. 부모님에게 배우지 못한 부분(공격적이지 않은 의사소통, 타인과의 연대...)을 사회생활을 통해 배워나가는 것은 너무도 많은 시행착오와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반드시 배워나갔다. 그렇게까지 똑똑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 반대도 아니어서 영어도 곧잘 하고 최근에는 제3 외국어인 태국어까지 배우는 중이다. 해외 생활을 하면서도 여행사나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내 주위의 온갖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일에도 뛰어나다. 내 동년배의 사람들 대비 체력도 꽤나 좋은 편이다. 최근에는 절대로 내 인생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금주도 성공했다. 이 정도면 나는 참 괜찮게 살고 있지 않나?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아도 나는 이 세상에서 살만한 값어치도 없는 천하의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 역시 스스로가 그려놓은 금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결국 그것은 부모님의 선택이지 나의 잘못은 아니다. 나는 부모님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며 삶의 즐거움을 느끼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저 그 뜻을 존중하면 그만이다. 부모님이 내 온몸에 매달려서 '이제 나의 행복은 오로지 너에게 달렸다'라고 하려고 한다면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라고 거절하면 된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 나는 부모님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대하지 숨막히는 의무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러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