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일년살기
탑은 두 개인데 하나는 전 국왕인 라마 9세, 하나는 그의 부인을 기리며 만들어졌다. (정확히는 전 국왕이 60세 되던 때에 만들어진 것) 탑 내부에는 불상과 함께 왕, 왕비의 업적을 묘사한 조각,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 같은 것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국왕과 부처님을 동급으로 놓는 구성이랄까.
탑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오늘은 부처님이 우리가 도이 인타논의 풍경을 보는 걸 원하지 않으시나 봐'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아쉬운 일정을 뒤로하고 다시 시내로 내려가는데, 정상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날씨가 좋아져서 도이 인타논 국립공원 입구 즈음에 다다르니 햇볕이 짱짱하게 내리쬐는 게 아니겠는가!! 화장실에 들르느라 잠시 차에서 내렸는데 바뀐 날씨를 보고 허탈해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산에서 내려오며 뷰를 볼 수 있는 곳을 한 군데라도 더 들리고 싶었으나 야속한 밴 운전기사는 정해진 시간에 치앙마이 시내로 돌아가려면 안 된다고 선생님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원래 참석하기로 한 학생들 중 절반이나 오지 않아서 교통비도 늘어나, 가서 음식도 맛없어, 풍경도 못 즐겨. 이것이 여행사 상품이었다면 평점은 거의 최하점이었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나서 우리 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60대의 미국인 노신사 '크리스'가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Thank you everyone, especially Khru Mint for organazing everything. What a great day!"
모두들 고맙습니다. 특히 모든 것을 다 기획해 주신 Mint 선생님이요.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요!
젊은 시절의 사진이 궁금할 정도로 굉장히 잘 생긴 얼굴의 크리스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띠고 친절하며 어학원에 나가는 날마다 나와도 많게는 20,30분씩 대화를 나누어 주시는 분이다.
이번 소풍에는 밴을 타고 가는 것은 힘에 부칠 것 같아서 따로 차량을 갖고 오셨는데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특유의 그 인자한 미소를 띠며 모든 일정에 참여해 주셨다.
그가 보낸 이 메시지를 보며 나는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자라온 환경이라면, 한국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손을 돕지도 않은 사람들이 뒤에서 일정이 엉망인 것을 두고 선생님 험담을 하지 않았을까? 혹은 가족끼리의 여행이었다면 앞에서 대놓고 누군가는 불만을 터뜨렸을 것이다.
"아니, 누가 오늘 여기 오자 그랬어? 음식은 왜 이래? 여기 말고 다른 데를 먼저 갔어야지!!"
실제로 이번 여행에 참석한 학생들 중 일부는 뒤에서 음식이 맛이 없다는 등 수군거리는 것을 보기도 했었다.
나는 평소 도이 인타논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이번 여행에 앞장섰기 때문에 '괜히 그랬나? 비수기니까 가지 말자고 했어야 했나?'라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은 오랜만의 도이 인타논 여행에서 학생들을 인솔한다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멋진 풍경은 감상하지 못해서 마음이 상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의 따뜻한 문자 하나는 선생님의 마음을 녹였을 것이고 나의 마음 역시 그랬다.
나는 크리스의 문자에서 인생을 배웠다.
첫 번째로 배운 것은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였다. 말 한마디로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줄 수 있다니. 아무것도 아닌 일로 책을 잡혀서 비난을 받는 것에 익숙하다가 이런 배려를 직접 목격하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두 번째로 배운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성공'이 될 수도 '실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기준으로 본다면 이 날의 여행은 실패에 가까웠다. 좋은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과란 음식, 풍경, 가성비 같은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았고 결과가 아니라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움직이고 대화를 나눈 것을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나는 내 인생을 대체로 실패로 규정했고 과거의 실패에 발목이 잡혀서 괴로워하는 나날이 많았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면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한 나의 삶도 What a great life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삶의 태도를 어린 시절부터 배울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내 삶의 지금 이 시기에 이 메시지를 받아보게 된 것도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메시지를 보려고 나는 치앙마이에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의 메시지 처럼 따뜻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도 간절히 바랬다.
크리스의 메시지 하나로 너무도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