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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ul 14. 2024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

#치앙마이 일년살기

최근 한 달간 채식만 하다가 심하게 아픈 것을 계기로 한 끼는 고기를 먹고 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태국식 삼계탕 비슷한 음식인 '카우만까이'를 먹었다. 닭고기 덮밥인데 함께 나오는 국물이 특히 삼계탕 국물 맛과 매우 흡사하다.


늘 가던 단골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문득 메뉴판을 올려다보니 몇몇 글자를 읽을 수 있어서 혼자 매우 뿌듯해했다. 이 집의 메뉴는 스몰/라지/점보로 사이즈를 나누는데 나는 항상 점보 사이즈를 시켜 먹는다. 점보를 시켜봐야 간에 기별이 갈까 말까 할 정도로 작은 양이다. 메뉴판에 จ้มโบ้ 라는 글자가 점보라는 영어 단어를 태국어로 옮긴 글자인 것을 오늘에야 이해했다.


삼계탕 비슷한 맛의 카우만까이


태국어를 읽는 데 있어서 다양한 예외 법칙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태국어를 자유롭게 읽지는 못한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둘씩 글자를 읽게 되니 흡사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기분이 든다. 태국에 처음 온 것은 벌써 10여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언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상태와 아닌 상태의 태국은 전혀 다른 국가 같다.


글자뿐만 아니라 회화도 마찬가지다. 태국어를 전혀 몰랐을 때는 태국어가 그저 아무런 의미 없는 소음처럼 들렸다. 이제는 태국사람들이 하는 말 중 한 두 단어 은 알아들을 수 있어서 그걸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추해내기까지 한다.


아주 약간씩 문장을 만들어 대화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기관지염으로 골골 앓다가 오랜만에 체육관에 나갔더니 코치가 왜 그동안 안 나왔냐고 묻는다. 그러자 나는 '샨 마이 사바이 디 땅때 삼 완 티 래우. 쨉 커, 아이 닛 너이. 프러 므아완 샨 빠이 하 머, 낀 야'라고 답했다. '3일 전부터 몸이 안 좋았어. 목이 아프고 기침도 했어. 그래서 어제 병원에 가고 약을 먹었어'라는 뜻이다. 굉장히 간단한 회화였지만 코치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을 잘 치는 다른 코치는 이 말을 듣고 '오, 코비드?'라고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코비드(코로나)아니냐는 것이다. 그러자 나는 다시 '므아완 샨 빠이 하 머, 머 와 샨 마이 코비드'라고 답을 했다. '어제 병원에 갔고 의사가 코비드가 아니라고 했어'라는 뜻이다. 코비드 검사를 했다는 태국어는 몰라서 영어로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코치는 '마이 차이 코비드'라는 말을 알려주었다. '코비드가 아니야'라는 의미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준 덕분이기는 하지만 참 신기하고 재밌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태국어를 읽고 태국어로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태국어만큼은 평생 이해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학교 성적을 잘 받아온 것도 아니며 회사에서 고과점수를 높게 받은 것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다.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아도 나 혼자 즐겁다.


탐험가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미지의 세계를 천천히 탐험하면서 이곳저곳에 나 혼자 가상의 깃발을 꽂는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즐겁지만 우울증 완화에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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