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치앙마이
주말에는 아무 것도 못 하고 쓰러져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주 주말은 평소보다는 참으로 활기차게 보내는 중이다. 토요일에는 영화를 봤고 일요일에는 꽤나 많은 양의 집안일을 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글을 쓴다.
치앙마이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책을 쓰겠다는 계획은 영 글러먹은 것으로 보인다. 불안장애 치료를 위해 약을 복용하는 나는 치앙마이에서 지낼 때 대비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이 1/10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하루의 목표는 잠을 잘 잔다거나 회사 일을 처리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 뿐이다.
글쓰는 데 힘을 쏟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최근에 내가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 때문이다. 많은 회사들, 특히 스타트업들이 그러하듯 업무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은 편인데 내가 나서서 그걸 하나씩 처리하는 중이다. 그것까진 좋다. 그게 임금을 받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나를 둘러싸고 거의 대부분의 동료들이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나의 불만을 털어놓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비율로 보자면 90대 10수준이다.
회사를 다니며 이런 적까지는 없었기에 지금의 상황에 대해 무척이나 신기해하는 중이다.
치앙마이에서 공황발작을 동반한 불안 증상으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서 불안장애 치료를 받는 나는, 회사에서는 매우 차분하게 눈 앞의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있고 이런 나를 보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는다는 동료들이 있을 지경이다.
심지어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기존 R&R을 뛰어 넘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수준이라 기획/마케팅/운영 분야를 다 아우르고 있다. (실무를 다 하는 건 아니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주관하거나 못하겠다고 하는 걸 내가 하는 수준)
이 와중에 팀장님과 대표님 간의 갈등이 생겼는데 결국 대표님이 팀장님을 거르고 나에게 와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말하는 단계에 도달해버렸다. 나는 중간에서 팀장님과 대표님의 통역을 진행하는 중이다. 결국 여러분은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어르고 달래고 있다.
물론, 회사의 그 누구도 내가 불안장애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그 당사자인 나는 '대체 왜 불안장애 환자에게 다들 이렇게 몰려들어서 자신의 불만을 못 털어놓아 안달인걸까?'라고 생각기도 한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주위 사람들의 불안에 휘말리면 나도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상태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선에서 주위의 불만을 쳐낸다. 주위의 불만이 '나는 이거 못 해'면 그걸 내가 한다. 이 얼마나 간단한 해결책인가. 그럼으로 인해 내 일이 늘어난다고 해도 억울하거나 하지도 않다.
그 어떤 것도 내가 치앙마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초반에 겪었던 불안증상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글을 쓰다보니 정리가 된다.
고통의 시간이 나에게 그렇게 의미 없지만은 않았구나.
술도 끊고, 병원도 열심히 다닌 보람이 있구나.
물론 이 수준이 과해지면 또 일 자체가 나에게 불안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테니 남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지는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기도 해야할 것이다. 이전에 만난 심리상담사 선생님 말씀처럼 '나는 파산 직전의 은행' 같아서 내가 가진 걸 남에게 다 내어주려고만 하는 것이 문제니 말이다.
그래도 치앙마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사회생활을 다시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것에 비하면 잘 하는 중이다.
결국 나는 다시 잘 적응해냈다.
이 사실 역시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