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플레이의 HBO 전문관의 작품들을 몰아보기 하고 있는 요즘.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더 펭귄'이라는 작품의 썰을 풀어보려고 한다.
해당 작품은 배트맨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악당인 '펭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배트맨이라는 고독한 영웅의 이야기로 시작했을 텐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렇게 주변인물들의 이야기까지 탄탄하게 세계관이 확장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배트맨이 만화에 등장한 것이 1939년의 일이라고 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덧붙여졌겠는가.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고 'one source multi use'라는 개념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하나를 잘 만들어서 변주해 가면서 이것저것으로 우려먹는다는 의미이다. 영상 분야뿐만 아니라 사업개발하는 사람들도 주구장창 하는 말인데 이 원 소스 멀티 유즈를 보려거든 고개를 들어 배트맨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대단하다 증말.
배트맨의 주변인물을 다룬 작품은 꽤 많았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영화 '조커'가 있을 거고 드라마 중에서는 배트맨을 돕는 제임스 고든 경감의 이야기를 다룬 '고담'이라는 작품도 있다. (고담도 매우 재밌다) 심지어는 배트맨의 집사인 '페니워스'만 다룬 드라마도 있고.
그러다가 이번에는 배트맨 시리즈의 유명 악당인 '펭귄'을 다루는 드라마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매우 심상치 않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대단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이건 대작이야!'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주인공 펭귄이 그 잘생긴 '콜린 패럴'이다. 잘생김의 대명사인 이 남자를 이렇게 분장시켜 놓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분장 보다 그의 연기에 집중하느라 분장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콜린 패럴 연기의 승리였다.
잘 알려진 설정이지만 펭귄은 몸이 불편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초창기 작품에서는 기형아라서 진짜 펭귄같은 외형을 한 캐릭터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다리가 불편해서 뒤뚱거리며 걸어서 펭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설정이다.
어찌 되었건 배트맨 세계관 속 펭귄은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니지 못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며 말발이 특출 나게 발달한 인물로 나온다. 그래야 조직도 장악하고 배트맨을 괴롭힐 수 있는 악당계의 거물이 될 수 있었을 테니 자연스러운 설정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이 펭귄의 말발이 천상계의 수준인 것으로 그려진다. 분명히 악당에다가 성격도 사이코패스 수준인데 말발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홀려서 듣게 된다. 분명히 '이 정도면 펭귄도 살아날 길이 없다'라고 보이는 상황에서도 펭귄은 상대를 설득하거나, 혹은 기존에 본인이 해 두었던 밑작업에 의해 살아남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과장이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가서 참으로 대단한 연출, 각본, 연기라고 감탄을 하면서 봤다.
이런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천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범죄세계에서는 누군가와 죽일 듯 싸워야 하지 않는가? 그 역할을 남성이 아닌 여성이 하는데 이 여성 연기자의 연기력이 또 천상계 수준인 거라 입을 쩍 벌리고 감탄만 하면서 작품을 감상했다.
해당 배우는 '크리스틴 밀리오티'라는 배우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다가 이번 작품으로 '성공에 성공했다'. 나는 그녀의 캐릭터의 설정과 연기를 보며 '이게 페미니즘 아닌가?'라는 생각을 내내 했다.
최근 몇 년간 헐리웃에 불어닥친 'PC(정치적 올바름)' 바람으로 인해 '걸 파워 짱짱!'이라든가 '흑인이 인어공주야, 짱이지?'와 같은 일이 벌어졌었다. 나도 여성이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성별이나 인종이 아니라 서사와 연기력이라고!!!! 인어공주가 망한 건 일단 연출이 개판인 데다가 주인공도 연기를 못해서라고!!!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대형 작품의 여성 메인 빌런은... 최근의 이런 PC유행 사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엇이 재미이고 연기인지, 심지어는 무엇이 '여성의 힘'인지까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배트맨 세계관의 유명한 마피아 조직인 '팔코네' 조직 보스의 딸인 소피아는 펭귄의 배신으로 배트맨 세계관 최악의 정신병원 아캄에서 10년을 보내게 된다. (펭귄이 개새끼다 증말)
조신한 부잣집 고명딸이었던 소피아는 남성 캐릭터들에게 이용당하며 처절하게 바닥까지 떨어진다. 원래 미치지 않았던 소피아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미쳐버린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그런 미친 여자 캐릭터를 연기하지 않는다. 처참한 불행 앞에서도 (잘못된 방향성이긴 하지만) 이걸 딛고 일어서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이 배우의 큰 눈망울은 선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저 눈이 미쳐 돌아버렸을 때 그걸 보는 관객인 나의 팔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미침'이 너무 정당해서 살짝 눈물이 핑 돌면서 이 여성의 복수극을 뒤에서 응원하게 되었다.
불합리한 현실에 고통받으면서도 그저 징징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맞서는 것, 이것이 진정한 페미니즘 아닐까.
그 외에도 해당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서사가 매우 탄탄해서 연기의 신 대잔치를 보는 기분이었다. 어느 캐릭터 하나 버릴 캐릭터가 없다.
어떤 평론가는 이 작품을 DC의 '소프라노스(매우 유명한 드라마로 마피아 세계를 다룸)'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이 드라마는 마피아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사악함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고담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기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린다. 이런 비슷한 일...주변에 많지 뭐 멀리 안 가도 내가 다닌 회사들에서도 모두 다 권력 다툼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시즌 1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는데, 과연 시즌2에서 이 완벽이 이어질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이지만 일단 이런 작품이 세상에 나왔고 내가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