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돌려보다가 외국에 사는 사촌동생이 출연한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집을 소개해주는 채널인데 유튜버가 동생네 신혼집에 방문했다. 영상에 나온 사촌동생은 아들만 셋인 집의 막내로 형들이 결혼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는데 막내도 최근 결혼을 했나 보다.
이 녀석을 본 것은 거의 15년 전의 일이다. 사촌동생들이 어렸을 때 잠시 한국에서 몇 년을 살아서 그때는 자주 보았고 내가 대학교 1학년일 때 동생네 집에서 일주일 정도 함께 지낸 것을 끝으로 서로 왕래하지 않고 지낸다.
친척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까닭은 아빠로부터 비롯되었다. 자꾸 내 인생의 모든 불행을 아빠 탓으로 몰고 가는 건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만큼 부모가 자식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의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빠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깎아내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형제자매들과도 멀어지게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그 자식들도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아빠의 형이자 나에게는 작은 아버님이 되시는 분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의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의 일이다. 아빠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을 자신의 조카를 위로하기는커녕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너도 열심히 일하면 삼촌처럼 서울에 집을 살 수 있다'라고만 말했다. 나도 같이 식사자리에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내가 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빠의 조카들 중 명절이나 새해가 되어 아빠에게 연락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 후, 아빠는 나에게는 각종 언어폭력을 지속했지만 뒤에서는 집안 가족들에게 내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게 꼴 보기 싫었는지 나도 가족 중 누군가에게 '네가 그렇게 똑똑하다매?'라고 비아냥 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랬던 아빠는 아마 지금은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까지 나오고 나서 결혼도 하지 않고 대기업에도 다니지 못하며 자신과의 연락도 끊은 내가 부끄러워서일 것이다.
사촌동생이 출연했다는 유튜브 영상을 아빠가 볼지는 모르겠지만, 사촌동생의 모친인 나의 고모의 입이 매우 가볍기 때문에 아빠에게 자랑을 할 것이고 그래서 아빠도 보게 될 확률이 크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곱게 자라서 때가 되어 결혼해 잘 사는 사촌동생 부부를 보면서 아빠는 엄마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모르겠다. '네가 잘 못 키워서 딸년이 이렇게 된 거다'라고 말이다. 사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일 텐데, 엄마도 자신의 가족이라든가 친구들 모임에서 더 이상 나를 언급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사촌동생들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동시에 가족에게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기도 했다. 아들 셋 중 첫째는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회계학을 공부하고 배 나온 회계사가 되었다. 아들 셋 모두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한인 성당에서 배필을 만나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고모가 아들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서 숨이 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이렇게 한국 부모들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취급할까? 스무 살 정도까지 키워놨으면 그 이후에는 원하는 대로 알아서 잘 살아라, 각자 갈 길을 가자고 할 수는 없는 걸까?
나도, 사촌동생들도 이미 만으로 서른을 넘긴 '성인'으로 분류되는 나이지만 부모가 원하는 길에서 벗어나는 삶을 사는 것에 자유롭지 못하다.
오랜만에 영상으로나마 사촌동생을 만나서 반가웠지만, 이 영상을 보고 화를 낼 부모님이 떠올라서 치앙마이에서의 평화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빨리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엇을 이루어내야 하는 걸까? 무엇을 이루어내야 부모님이 나로 인해서 가족 친지들 앞에서 쪽팔리지 않을 수 있는 걸까?
한국이었다면, 나는 이런 상황을 마주하자마자 급격히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졌을 것이고 곧장 가게로 가서 그게 무엇이 되었건 술을 사 와서 질펀하게 마셨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영원히 내 앞을 가로막은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존재겠으나 이제 더 이상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을 해치지는 말아야지, 그런 생각이다.
치앙마이는 나에게 뭐랄까, 일종의 재활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치앙마이 요양병원, 책을 쓴다면 이런 비슷한 제목을 생각해봐야겠다.
작년에 치앙마이에 왔을 때 본 옆집 고양이, 올해도 건강히 잘 있다. 역시 정신건강에는 고양이가 최고다.
치앙마이 대학교의 어디인가. 치앙마이에서는 빡칠 때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초록초록이 사방 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