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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30. 2024

세세하고 소소한 것들




그렇다면 문학적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보여주기가 아니라 말하기가 소설의 진짜 힘이고, 소설이야말로 사유와 사변을 담는 예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상업계 관계자들을 만난 뒤로 나는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길게 웅변을 하거나 한 문제를 골똘히 고민하는 장면을 집어넣는 것을 더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의 소설 쓰기는 이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중에서




줄거리 사회

줄거리란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로 자칫 '군더더기를 다 떼어 버린 나머지 골자'로 이해해 핵심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핵심은 줄기가 아니라, 뿌리나 봄날의 새순과 꽃, 여름의 잎, 가을의 열매들이다. 이들의 순간성과 복잡성이 군더기기로 쉽게 치부해버린다.


드라마, 영화, 소설의 줄거리에 집중하는 이들이 있다. 줄거리를 알면 안다고 믿어버리는 편리와 편협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누군가의 스토리를 알면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줄거리와 스토리는 정보라는 이름으로 가상공간에 차고 넘친다. 줄거리를 복사하고 붙여넣어 재생산하기를 무한 반복한다.


드라마 속 인물의 대사 하나에 인물 캐릭터 전체가 들어있고, 영화 속 미장센(상징적 장면 배치와 연출)과 오브제(상징적 물건)에 영화 전체의 울림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생각과 행동 속에 소설 전체의 주제가 들어있다. 대사, 침묵, 표정, 행동, 생각, 마음... 이런 자잘하고 세부적인 것들이 중요하다. 줄거리는 핵심이 아니다.




사변(四邊:변두리)을 사변(思辨:생각으로 판단)하기

장강명 작가는 수필집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영상의 은밀한 유혹'에서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소설의 자리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보여주기가 아닌 말하기가 소설의 힘이며 '장광설'이야말로 소설이 지켜내야 할 자리라고 했다. 영상업계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의 문제를 깊게 생각하거나, 길게 웅변하는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소설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소설의 알맹이는 문장에 있다. 소설의 문장은 주인공 사변(四邊:변두리)을 둘러싼 사변(思辨:생각으로 판단)의 조각들이다. 등장 인물의 생각을 말한 것일지라도, 작가가 생각한 것을 표현한 대리물이다. 영화의 미장센과 오브제가 소설에서 문장인 셈이다. 영화의 고급 감상자는 미장센과 오브제에 집중하고, 소설의 고급 독자는 문장에 집중한다.




소설과 영화

영화는 보여주기다. 내가 사춘기 시절,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를 보면서 카메라가 한 인간을 평생 동안 따라다닌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진지하게 했었다. 영화의 주제의식인 '미디어 시대의 그늘'은 식상했다. 타인을 향한 관찰이 면밀하고 지속적이면 사랑으로 꽃 핀다고 읽었다. 카메라라는 도구에 관심이 생겼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내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람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소설은 언어로 말하기다. 언어는 기호이므로, 기호를 머릿속에서 이미지화(영상화) 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것을 '독해'라고 부른다. 영상은 독해의 과정이 생략된다는 편리함이 있다. 영상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텍스트 독해 능력을 상실한다(어린 아이들이 이미지로 가득찬 학습만화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독해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훈련은 고도의 집중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고난도의 활동이다. 소설은 영화가 표현하지 못하는 시각 너머의 세계를 표현한다. 영화가 발명되기 전에 소설은 먼저 있었다.


나는 소설과 영화 모두를 사랑한다. 두 매체 모두 내면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치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를 찾아 다녔다. 일찌감치 표현의 한계를 알아차린 영민함이 나를 예술취향적 인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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