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恩人

... 부디 좋은 곳으로 잘 가시게

by 무위




창현이 장모를 살렸다. 아산병원 첫 진료를 받고 예상보다 빠르게 수술 날짜를 잡은 바로 그날이었다. 아직 완전히 살아났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희미하게 희망에 들떠 있었다. 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오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은 아내는 초조해했다.


새벽에 장모가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했다. 그때 장인은 아픈 사위와 딸을 위해 서울행 운전기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모는 우리 집에서 내 딸과 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장모는 어제 초저녁부터 가슴이 조금씩 조여왔고 새벽에는 혼자서 손쓸 수 없이 아파왔다고 했다. 그때 마침 도움 청할 사람이 생각났다고 했다. 서울로 떠날 때 아내는 아들과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새봄이 엄마 전화 번호를 알려주고 갔다.


새봄이 아빠가 창현이다. 나와 동갑내기.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된 동네 친구다. 새벽에 창현은 장모를 파티마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 우리가 없는 동안 장모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장모의 상태를 알려왔다. 장모의 상태는 심각했다. 심장을 검사했고 막힌 혈관을 찾아냈다. 급하게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창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 장모와 내가 거의 동시에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장모가 더 급박한 상황이었다. 아내는 인천에 살고 있는 오빠와 연락해 아산병원 심장내과 전문의를 찾았다. 병원의 도움을 받아 그날 바로 엠뷸런스로 장모, 장인과 아내는 창원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아이들과 남아서 입원 준비를 했다. 장모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나쁜 일이 이렇게 겹쳐서 오기도 하는구나. 정신이 없고 멍했다. 이런 위급 상황에 사위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도 환자였다. 수술 날짜 받아 놓은 위암 환자.


아산병원 심장전문의를 찾는 일과 수술방 잡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아내의 침착한 대응과 장모의 좋은 운이 합쳐져서 상황은 그런대로 수습되어 갔다. 장모는 곧바로 심장 수술을 했다. 아내에게서 수술이 잘 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아내와 나는 전화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럴 땐 하늘을 째려봐야 할까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할까. 애매한 표정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내도 이 밤 서울에서 나와 똑같이 하늘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 주일 후 나는 위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일 주일 후에 장모가 환자복을 입은 채로 사위의 병실로 찾아왔다. 둘은 손을 잡고 웃었다. 아내는 우리 둘을 보며 어이가 없어 웃다가 기뻐서 울다가 했다.




그리고 6년 뒤, 건강하던 창현이 쓰러졌다.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여러 차례 수술과 항암치료를 했다. 나는 그를 부르는 특별한 호칭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 가정을 꾸린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 처음 만났다. 동갑이었지만 직업도 성격도 가치관도 달랐다. 각자의 아내들과 아이들이 우리 둘의 어색한 관계를 억지로라도 이어가게 했다.


그리고 또 1년 뒤 처가에서 날씨가 맑은 봄날 창현의 부음을 들었다. 코로나 위세가 한창이라 아내의 만류도 있었지만 애초부터 나는 조문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동갑내기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의 죽음… 매일 죽음을 생각하고 쓰고 있지만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


죽음 자체가 두렵다기보다 나와 연결된 남겨진 자들의 깊은 슬픔이 무섭다. 그 슬픔이 죽은 나의 것은 아닐 테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유산처럼 남겨질 내 흔적들과 기억들을 어찌할 수 없어 내 죽음이 무섭다.

남겨진 창현 가족의 깊은 슬픔과 대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죽음이 있는 현장으로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울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최근 초상집에는 거의 가지 않고 부조만 전했었다. 내 불안과 우울을 따라가면 죽음과 잇닿아 있다는 걸 어렴풋이 무의식이 감지하고 있어서일까. 인간적인 도리나 염치보다 죽음의 공포를 이길 길이 없었다. 이 두려움을 떨칠 날이 올까. 나이가 더 들면 더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면 괜찮아질까.




상복 공원. 창현의 첫 기일이다. 아내와 함께 창현이 잠든 납골당을 찾는다. 수현이 떠나기 전에도, 창현이 떠나기 전에도 나는 생전에 그들을 보지 못했다. 아니다 보지 않았다. 후회는 없다. 아니다 보지 않은 나를 책망하고 후회한다.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덜 아프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아픔과 죽음이 아직도 무섭다.
유골함은 가로세로 30센티미터 아파트 같은 공간 2동 2층에 자리 잡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1973년 9월, 출생연도와 '류창현' 이름을 멍하니 한참을 바라본다. 그의 아내는 고인의 사진을 붙여놓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서 아직 못다 흘린 눈물을 훔쳤다. 아직도 너를 잊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하구나.
창현의 유골은 언제까지 이 좁은 곳에서 지내야 할까. 흙과 물과 공기 속으로 그를 자유롭게 돌려보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창현이 암을 이겨냈다면 우린 진짜 친한 친구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 2021. 3.13.토 ‘무위록’ 중에서




지나치게 미래를 낙관하는 자세는 현재를 유보하게 만든다. 오히려 비관적 미래가 현재를 의미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한부. 어떻게 보면 모든 인간은 시한부 인생을 산다. 다만 말기 암환자들은 자기 생명의 한계점을 가까운 미래로 알고 있고 보통 사람들은 먼 미래 언제 쯤이라 한계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차이뿐이다. 암을 겪은 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자주 상상한다. 암으로 인한 시한부는 육체의 통증으로 점철될 것이어서 삶을 돌아본다거나 정리한다거나 하는 고상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건강한 상태에서 시한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은 현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런 걸 '메멘토 모리'라 한다지. 아산병원 종양내과 의사 안선영이 쓴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을 읽고 있다.


'이걸 해야 해'보다는 '지금 잘하고 있다'는 격려, '힘내요'라는 재촉보다는 '힘들지요'라는 인정이 환자의 마음에는 더 위안이 될 수 있다… <제대로 위로하기>에 의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은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짐이 될까 싶어 피하게 된다'라고 한다… 그래서 힘들어하는 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먼저 다가가려는 노력과 관심이다. 동료의 방문과 책선물을 '참으로 반가웠다'고 표현한 것에서도 드러나듯, 작은 관심도 아픈 이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어려운 일을 겪어본 이는 알 것이다… 그보다는 환자의 감정이 어떤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문자메시지 한 통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주는 마음보다 그가 받는 마음을 더 중심에 놓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 김선영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중에서


"나는 잘 이겨내고 있어. 앞으로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항암 치료 초기. 창현이 내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카톡 문자가 생각났다. 창현이 떠나고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내 우울의 근원을 따라가다가 떠오른 말이었다. 카톡방으로 들어갔다. 문자는 지워져 있었다. 그는 생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흔적들을 지워 나갔을 것이다. 그는 내게 무슨 도움을 받고 싶었을까? 나는 그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창현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궁금할 때마다 아내에게 몇번이고 의견을 물었다.
"만나러 갈까?"
"당신은 항암 치료 할 때 누군가가 찾아오는 게 어땠어?"
아내는 누구보다 환자의 입장을 잘 아는 당신이 해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글쎄… "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 와준다면 위로가 될 것도 같았고 항암약으로 검게 타들어가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주변에서 들은 지인들의 암 경험담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암을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람이 내 마음을 공감해 준다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이 감정을 끌어내지 못했다. '도움'을 '말'로 바꾸니 해답은 쉬웠다. 맞다. 말 한 마디면 되었었다. 힘들지? 조금만 견뎌 보자고. 곧 터널의 끝이 보일 거라고. 말해 주지 못했다. 그거면 됐는데. 이 말을 해 줄 자격을 갖춘 사람은 나 밖에 없었는데. 꼭 내가 해 줬어야 하는 말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문자를 내가 먼저 보내자 창현이 내게 보낸 답문자 같기도 하다. 기억은 왜곡되고 흐릿하다.
죽음이 드리운 그의 얼굴을 보기 두려웠을까? 항암약으로 검게 타들어 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거라고 지레 생각을 매듭지어 버렸다. 투병 중인 그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격려의 문자도 남기지 않았다. 나의 첫 저작 원고를 보충하면서 회한의 눈물을 쏟는다.
- 2021.6.21.월 '무위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