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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06. 2023

인간의 일기가 빅데이터로 모인다면




자기만의 일기장에 일기를 쓰는 것은 요즘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완전히 쓸데없는 짓으로 보인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것을 왜 쓰는가?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중에서


'인간 기반 글쓰기 알고리즘'으로 브런치스토리 글쓰기

하나, 생각이 올라오면 곧바로 디지털기기(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데스크탑)로 'EVERNOTE' 앱에 타이핑한다.

둘, EVERNOTE에 5천 개의 생각의 덩어리들이 쌓인다.(생각의 '스몰 테이터베이스Small database'화)

셋, BRUNCH STORY에 쓰고 싶은 글이 있으면 EVERNOTE에 키워드를 검색한다.

넷, 관련된 내 생각 노트들이 나열되어 뜬다.

다섯, EVERNOTE의 '브런치' 폴더에 '새노트'를 만든다.

여섯, 검색된 내 생각 노트들에서 마음에 드는 문단과 문장을 'Ctrl+C(복사)'한다.

일곱, '새노트'에 'Ctrl+V(붙여넣기)'를 한다.

여덟, 문단을 신중하게 배열하고 구성한다.

아홉, 문장을 추가하고, 삭제하고, 편집하면서 글을 써나간다.

열, 글의 제목을 단다.

열하나, 스마트폰에서 내가 찍은 사진 중 배경 사진을 찾는다.

열둘, 한편의 브런치 글이 완성된다.

열셋, '발행'을 클릭한다.




EVERNOTE

나의 생각 메모들은 이미 '에버노트 앱' 개발자의 손안에 들어갔다. 어플리케이션과 저장공간 사용료를 지불함으로써 나의 '일기'를 넘긴 것이다. 내 '일기' 폴더 하나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므로 그들은 관심이 없다. 디지털 숫자 0과 1의 먼지 하나일 뿐이다.


에버노트 공간은 내 생각과 글들을 모아놓은 '스몰 테이터베이스Small database'이다. 아날로그적 종이노트가 가지는 감성은 없다. 하지만 시공간의 한계성을 너끈히 뛰어넘는다. 5년 전 어느 날 버스 안에서 했던 생각, 3년 전 어느 날 공원에서 읽었던 작가의 문장, 일 주일 전에 썼던 단상 등 흩어져 있던 글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키워드로 하나의 노트에 모인다. 사회심리학자 김정운이 <에디톨로지>에서 말한 편집자적 글쓰기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모인 문장의 양이 너무 많아 버리는 작업이 핵심이다. 글쓰기는 '더하기'가 아니라 '버리기'다. 글쓰기와 퇴고의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는 셈이다. 주제에서 먼 문장부터 지워 나간다. 그러다가 남는 하나의 문장이 이 글의 중심문장이 된다. 살아남은 몇 개의 문장으로 생각을 확장하고 글을 다듬는다. 새로운 글이 완성되면 에버노트에 하나의 데이터로 자동 저장된다. 이 데이터는 또 다른 문장과 글을 생산하는 씨앗이 될 것이다.


에버노트 '책' 폴더에는 내가 읽은 책에서 필사한 문장들이 한땀한땀 타이핑 되어 있다. 책에 있는 내용 중에 지식과 정보는 기록 대상이 아니다. 필요할 때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하면 된다. 언제든지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를 굳이 내 노트에 옮기는 건 헛수고다. 내 마음과 감정을 건드리는 문장을 사냥하듯 낚아챈다. 이 문장들은 내 글쓰기에 영감을 준다. 타이핑한 필사 문장은 연필로 꾹꾹 눌러쓰는 느림의 미학은 없지만, 내 글을 쓸 때 자극제와 보충제가 된다. 에버노트는 공개되지 않은 '생각의 보물창고'다.




BRUNCH STORY

브런치는 공개하는 글이다. 독자를 의식하는 공적인 글쓰기의 장이다.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e:유목)'의 '부유성浮遊性'에 가끔씩 현기증을 느낄 때가 있다. 개인을 일관성 있게 탐구하기 힘든 조각난 생각의 흔적들이다. 읽어 달라고 공개하지만 읽히지 않는 글이다. 넘쳐나는 일인칭 자아가 소비되고 쟁투하는 공간이다. 속도가 사유의 지구력을 집어삼킨다. 이곳에서 언어는 짧으면서 얇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거나 서점에서 사서 읽는 행위는 선택에 신중함을 요구한다. 시간과 노력이 소비되고, 비용이 지출되기 때문이다. 어렵게 선택한 책은 음미하는 느린 시간으로 채워진다. 작가가 낳은 책은 작가로부터 완전히 떠나간다. 책과 독자의 만남은 깊고 은밀하다. 독자는 작가와 물리적으로 분리되면서 강한 친밀감을 느낀다. 시간이 느리게 개입한다.


가상 공간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 책은 없고 이미지와 텍스트만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다. 작가는 독자를 원하고(보통 '구독'과 '라이킷'으로 숫자화 된다), 독자는 작가와 연결되고픈 지독한 열망에 빠진다. 작가가 독자이고 독자가 작가이다. 근거없는 칭찬과 무관심 사이에서 작가는 무방비로 흔들린다. 작가와 독자가 하나되는 욕망의 품앗이.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채를 하려고 애쓴다. 작가의 언어는 추상적이고 독자의 언어는 뻔하다. 노마드들은 연결의 끈이 느슨하다고 느끼면 또 다른 글과 작가, 독자를 만나러 떠난다. 쓰면 쓸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글과 타인에게서 소외된다. 글쓰기는 혼자 지난한 숙성의 시간을 견디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러면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AI

나는 아직 인본주의와 자유의지를 신뢰하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가벼워지고 얕아지는 언어 현상을 걱정했었다. 나 또한 그런 언어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다. 디지털 공간을 떠도는 언어를 무시했다. 빅데이터와 디지털 알고리즘에 대한 부정적 생각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의 원인은 무지였다. 디지털 공간에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이 표현되어 타인에게 흘러서 모이면 데이터가 된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의미의 실용적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의 미덕은 질보다 양이다. 질이 좋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하나의 정보에 기대기에 세상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최근 에버노트에도 인공지능 기반 검색 기능이 추가되었다. 세계인의 일기가 데이터베이스화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했다. 인간 개인의 자잘한 진실이 담긴 마음이 데이터베이스화 되면 AI는 더 정교하게 인간 마음들을 모방하고, 학습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SNS는 개인의 생각, 취향, 마음 등이 공유되는 집합체다. 이 정보들은 이미 빅데이터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AI의 전원스위치를 켤 수도 끌 수도 있는 '데이터교*'의 신은 인간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빅데이터교는,

하나,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둘,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셋,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라는 교의를 따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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