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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16. 2023

삶에 육박*하는 소설쓰기




통영 '봄날의 책방', 김탁환 <사랑과 혁명> 북토크에 아내와 참여했다. 1년 전 쯤, '다큐ON-농부와 소설가'를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봤었다. 김동현 농부과학자와 작가 김탁환의 친환경 농촌생활,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이야기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잘나가는 작가가 갑자기 곡성에는 왜 왔을까 의아했다.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쓴다고? 그럴 수 있다. 왜 하필 곡성일까? 궁금했다.




질문.

작가에게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농사짓기는 정착한다는 것이고, 작가님은 스토리를 찾아서 곡성으로 오셨다고 했는데... 작가님은 앞으로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어떤 말들을 어떻게 조합해야 내가 궁금해 하는 핵심을 짧고 굵게 알아 듣게 할까, 몇 개의 질문 문장을 머릿속에 다듬고 굴렸다.




질문 속의 질문.

내 질문 속에는,


"작가님은 지금 텃밭농사를 짓고 있지만, 앞으로 진짜 농부가 되고 싶은가요?" (공격형으로, 당신은 농부 코스프레 하시는 거 아닌가요?)

"작가님은 정착민인가요, 노마드인가요?" (직설형으로, 당신의 정체성은 농부인가요, 작가인가요?)

"작가님은 곡성으로 온 이유가 <사랑과 혁명>을 쓰기 위해서, 그것도 '정해박해'의 현장 감옥터에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이 소설을 완성했으니,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의심형으로, 당신은 결국 곡성을 떠나실 거 아닌가요?)

"작가님, 앞으로 창작 계획은 무엇인가요?" (질투형으로, 곡성에서 쓸 다른 스토리를 발견하셨나요?)


이런 많은 구체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권리로 작가에게 이 따위를 궁금해 할까, 생각하니 약간의 민망함이 몰려온다.




대답.

작가는 역시 작가였다. 단 한 문장을 질문했지만, 작가는 질문 속의 질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챘다.


"제가 올해로 농부대학 3년 차인데 내년 목표는 4년 차 채워서 졸업하는 거고요. 졸업하면 벼농사를 제대로 지어보고 싶어요."

"장담할 순 없지만, 앞으로 20년은 곡성에서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앞으로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어요. 곡성도 사라질 농촌 10위 안에 든다고 하는데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써 나갈까 생각 중이에요. '존 버거'처럼요."

"농사짓는 일과 작가의 일은 비슷해요. 농부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한 건 없다고 해요. 볍씨 하나에 수 천개의 쌀알이 맺히는데 그 중에 농부는 한 알 정도의 노력만 기여했다고 생각하죠. 땅에서 농사짓은 농부는 땅보다 하늘을 더 많이 봐요.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농사는 가능하니까요."


질문 속의 질문을 정확하게 알아채고, 뭉뚱그려 퉁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긴 시간을 할애해서 성심껏,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답 안의 대답.

작가의 정성어린 긴 대답을 알맹이만 모아 보면,


"나는 지금이 오십대 중반이니까, 여기서 20년은 더 살게 될 것 같구요. 그렇단 말은 마지막 생은 여기서 보내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봅니다. 그 만큼 농부의 생활에 만족하구요. 도시생활은 지금까지 살아봤으니까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흐름에 내맡기며 살고 싶어요. 지구력 있게 견디는 농사일과 작가의 글쓰기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서 농부의 마음으로 한땀한땀 쓸 것입니다."




작가는 왜 곡성으로 왔을까, 하는 궁금증은 소설 <사랑과 혁명> 발표로 해결되었다. 곡성은 소설의 배경인 '정해박해'의 핵심 성지였다. 농부는 부캐로 따라 왔을 것이다. 그런데 부캐가 진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사 그가 곡성을 떠난다고 해도 그 순간에는 그때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는 신의 명령을 조용히 따를 것이다. 나의 질문은 우문이었고, 그의 대답은 현답이었다. 삐딱한 의심과 찌질한 질투의 마음이 진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탈하고 진솔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작가의 '뚝심'을 배웠다.


내가 구입해 가져간 소설 <사랑과 혁명>에 그는,


"신은 흐르고, 인간은 멈춘다"


라는 문장을 싸인과 함께 남겼다.



*육박(肉薄: 바싹 가까이 다가붙음)은 작가가 소설을 쓰는 태도에서 적절한 단어이고, 육박(肉縛: 죄인의 옷을 벗기고 알몸뚱이 상태로 묶음)은 작가의 소설 <사랑과 혁명>의 주제의식에서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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