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둥바둥 김대리 Dec 27. 2021

이렇게 하다 보니 1년에 4,000만원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이 생기다


결국 사고를 처 벼렸다. 해냈다. 1년을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에 통장 잔고를 보니 4,000만 원이 쌓여있었다. 에어컨도 없는 회사 기숙사에서 선풍이 하나로 버티고, 무궁화호 입석을 타고 다니며, 데이트 통장으로 돈을 아끼고, 회식 이후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에 가고. 절약 정신으로 철저히 중무장하며 1년을 버티다 보니 나온 결과물이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이 방식으로 결국 큰돈이 모였다. 그냥 닥치고 돈을 모은 결과였다.



평범한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해서, 가진 능력이라곤 엑셀, 파워포인트가 다인 사람이 과연 월급 이외 수입을 만들 수 있을까. 평균 이하의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노동 수익밖에 없다. 일단 그렇게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들어오는 수입이 세어 나가지 않도록 아껴야 했다. 그리고 또 아껴야 했다. 철저히 근검절약을 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 특별한 비책이 있고, 특별한 투자 스킬이 있는 건 아니다. 처음은 다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직장 1년 차 병아리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나. 그냥 받는 월급으로 적금을 들었다. 돈을 묶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1년 적금 이율이 2% 라 하더라도, 1년 만기 적금의 경우 첫 달은 온전히 2% 이율이 적용되지만 마지막 달은 한 달치만 적용이 되는 것이었다. 말이 복리 적금이지 진정한 복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로 해제를 해버리고, 한 달 단기 예금으로 나 스스로 복리 예금 풍차 돌리기를 하였다.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투자기술이라면 투자기술이었다. 한 달 예금 만기가 되면 그다음 달 월급을 합쳐서 또 한 달 예금을 들고, 또 들고. 이렇게 반복해서 매달 진행하였다. 금액이 점점 커지니 점점 마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4,000만원을 모았다.

 



꿈이 생기다

수용소를 탈출하고 싶어



동기들에게 말했다. 이젠 더 이상 회사 기숙사에서 못 있겠다고. 내 삶이 없다고. 이제는 그만 회사와 멀어진 곳에서 출퇴근하고 싶다고. 무슨 수용소도 아니고, 눈뜨고 샤워하면 5분 거리의 회사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마치면 5분 거리의 집으로 걸어 들어오고. 그런 루틴 한 삶의 반복. 싫었다. 죽기보다 싫었다. 삶과 일이 구분이 되지 않고 집에 와서도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말도 어디 놀러 가지 않았던 나는 주말조차 평일의 연장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돈도 4,000만 원 모았겠다, 자신감도 생겼겠다, 비장하게 출가를 결심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동기들이 말렸다. 기숙사에서 살면 돈을 아낄 수 있는데 왜 굳이 나가려고 하느냐고 그랬다. 나가서 살면 월세도 내야 하고, 교통비도 들고, 돈을 못 모으게 될 것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맞다고도 할 수 없었다. 정확히 계산도 안 해보고, 경험도 해보지 않고 말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엑셀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수입과 지출을 정리해나갔다. 현재 가용 가능한 자산과 회사 셔틀버스가 다니는 지역위주의 월세와 전세를 알아보았다. 손품을 팔기 시작했다.



집을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이 강제 수용소 같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 회사 기숙사는 정말 숙식만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주변에 편의 시설이라고는 거의 전무하였다. 우리 동기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편의 시설은 편의점과 동네 통닭집. 치맥이 당기면 프랜차이즈 통닭집이 아닌 동네 통닭집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나마도 찾아가서 먹어야 했다. 주변은 공장이 즐비하였고, 저녁에 산책이라도 하려면 각종 화학물질 냄새와 함께 다녀야 했다.



입사 초기에는 취직을 했다는 즐거움과 월급을 받는다는 설렘에 배달도 되지 않는 통닭집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 주변의 편의시설? 괜찮았다. 살다 보니 적응이 되었다. 저녁만 되면 퇴근한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북적거리는 네온사인 밑의 화려한 거리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모두가 적응을 했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주말에 부족했던 네온사인 광합성을 하러 서울로 갈터였다. 그렇지만 나는 주말에도 나가지 않았기에 이 공간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네온사인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 그리웠다. 퇴근하고 서울 지옥철을 타고 다니는 게 부러울 지경이었다. 집이 회사와 가까운 게 모두에게 로망이었지만 나에게는 구속이었다.



그렇게 더 나은 주거환경에 대한 갈망이 커져나갈 무렵, 대부분의 회사 선배들이 산본 혹은 동탄에 거주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회사 셔틀버스를 타고 혹은 자차를 이용하여 회사로 출퇴근하고 계셨다. 그분들 역시 나와 똑같이 회사 기숙사와 아파트에서 시작해서, 결혼까지 하고, 애들도 키우면서 지내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사를 가셨다. '내가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너무 섣불리 독립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사택이 사회 초년생에게 경제적으로 자리 잡는데 크게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독립을 해도 돈을 모을 자신이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여전히 안 쓰고 살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벗어나면 일의 능률도 올라가고 나의 삶의 만족도도 훨씬 올라갈 것이니, 그런 컨디션 상태면 돈도 더 많이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입사한 지 1년도 안되어 4,000만 원을 모으고 산본에 소재한 오래된 다가구 주택 전세로 이사를 나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데이트 통장 쓰는 게 이상한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