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던걸 그때도 알았다면
정말 경제와 부동산에 무지했다. 바보 같다. 집이라는 건 내 돈이 다 있어야만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빚 없이 사면 뭔가 멋져 보였다. 능력자인 것 같았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생애 최초의 나의 집
이 정도로 까지 아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아껴서 모았다. 결혼을 약속한 지금의 아내와 데이트를 즐기면서도 미래를 위한 준비로 함께 돈을 모았다. 서로의 자산현황을 공유하였고, 심지어 수입이 얼만지도 공유하였다. 비록 혼인 신고는 안 했지만, 서로의 자산현황과 수입을 알게 되니 벌써 부부가 된 것 같았다.
아내는 일찌감치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박봉인 월급으로 1년에 1,000만 원씩 차곡차곡 모아가고 있었다. 나 역시 비록 전셋집이긴 했지만 매년 모아가는 금액으로 집평수를 늘리는 재미로 알뜰살뜰 돈을 모아가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첫 번째 전셋집도 그랬지만 두 번째 전셋집 계약기간 2년이 되기도 전에, 그동안 모은 현금을 보태어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졌다. 매년 4,000만 원 이상씩 모으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는 욕심이었다. 집 욕심이었고, 그렇게 평수가 늘려가는 게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좀 더 좋고 넓은 세 번째 전셋집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을 무렵, 결혼을 약속한 우리 커플에게 시련이 닥쳤다. 집안의 반대. 언제 결혼해야겠다는 정확한 계획은 없었지만, 양가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날짜를 잡으려 했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인사를 드렸는데 장인, 장모님의 마음을 사는 데는 실패했다. 삭삭하고 말주변 좋은 책임감 있는 콘셉트로 자신감 있게 인사를 드렸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을 살 수는 없었다. '자네에게 내 딸을 줄수 없네'.라고 말하는 듯 했다.
게다가 당시 철없던 나는 여자 친구 쪽 부모님이 나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께 필터 없이 고해바쳤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쳤지. 후폭풍은 거셌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잘난 아들로 여기며 키워오신 우리 부모님은 노발대발하셨다. 우리 아들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뭐가 아쉽다고 그런 평가를 받아가면서 까지 결혼을 해야 하나 생각하셨다.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괜히 나의 여자친구는 우리부모님에게까지 미운털이 박혀 버렸다. 나의 정신은 점점 안드로메다로 가고 있었다.
그러길 수개월. 결혼의 진전이 없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양가의 마음을 되돌릴 큰 한방이 필요했다.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면 여자 친구와 나의 결혼에 대한 확신이 변치 않다는 종지부가 필요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사고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랬다간 진정한 '골로 가는 루트'를 타는 것이었다. 그렇게 문득. '집을 사버리자. 내가 모은 돈으로 집을 사버리면, 이게 신혼집이라고 생각하실 거야'라고 생각했다. 완전 못박아 버리고 싶었다. 뭐 어쩌면 '집을 살 정도로 우리 사위가 능력이 있는 친구였구나. 우리 딸내미 시집보내도 되겠어'라고 생각 드시면 더 좋은 거고.
그렇게 2017년 1월. 세 번째 전셋집으로 이사 가는 건 잠시 보류하고 집을 사기 위해 계산을 떼려 보았다. 당시 이리저리 여자 친구와 나의 돈을 다 끌어모으니 3억이 채 안 되는 돈이 나왔다. 엄청난 돈이었다. 믿기질 않았다. 당시 나는 사원 기간 3년을 거쳐 대리 2년 차에 막 접어든 시점이었고, 직장생활 4년 동안 2억 원을 넘게 모았다는 사실에 벅차올랐다. 거기에 알뜰살뜰 박봉 월급을 내게 건네준 여자 친구의 돈까지 합치니 당시 31살인 나에게는 엄청난 거금인 3억 원이 손안에 들어왔다.
생애 최초의 나의 집
'혼자보다 둘이 낫다'. 그래서 그런 걸까? 혼자서 돈을 모으면 작지만 같이 모으니 큰돈이 되었다. 그렇게 3억 원이라는 두둑한 지갑을 들고 여자 친구와 손을 꼭 잡은 채 부동산 투어를 시작했다. 신혼집으로 살 예정이어서 신축 위주로 지역을 돌아다녔다. 전세계약 경험이 있었던 나는 부동산이 친숙했지만, 여자 친구는 그러질 못했다. 게다가 부모님과 함께 한평생 살아왔던 터라, 독립에 대한 마음은 있었지만 실제로 독립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사회적인 실질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함께 부동산에 들리고, 보고, 듣고, 배우다 보니 서로 레벨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평택의 한 신축 아파트에 임장을 가게 되었다. 이제 곧 입주를 앞둔 신축 아파트였다. 브랜드 아파트였고 나름 대단지 아파트였다. 당시 빌라에 살았던 여자 친구는 아파트 내에 있는 커뮤니티 시설과, 각종 편의시설로 마음에 들어 했고, 나 역시 원룸에서만 살다가 방이 3개에 화장실 2개가 딸린 새집을 보게 되니 마음이 혹했다.
한번 마음에 드니 모든 게 좋아 보였다. 택지개발지구로 묵여서 개발된 지역이라, 주변의 학교부지, 공원부지, 상권 부지 등 일목요연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아직 우리 아파트밖에 없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옆 단지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고, 또 그 옆에도, 건너편에도, 여기저기 아파트들이 줄줄이 입주를 앞두고 있었다. 편의시설이 들어서는 건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가까운 고덕에 삼성전자가 있다고 하지 않나? 투자적인 관점으로도 너무나 좋은 집 같았다.
이미 나는 눈이 돌아가버린 상황이었기에 모든 게 긍정적으로 해석이 되었고, 집 앞에 초등학교가 있고 주변에 대형 상권도 있기에 '옳다구나!'싶었다. 그렇게 로열동 로열층 매물을 거래하기로 결심하였다. 최종 협의 금액을 듣던 중 분양권을 들고 있던 매도자는 피를 요구했다. 나는 처음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피란 아파트 프리미엄의 약자로 흔히 말해 '웃돈'을 의미했다. 본인이 분양받은 금액에 '웃돈'을 나에게 요구한 것이다. 망설여졌다. 매도자는'웃돈'을 요구한 금액인 1,000만 원을 가만히 앉아서 쉽게 번 것이 못마땅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나로선 '주는게 맞는 건가?'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중개사 아주머니는 '아파트 사면서 피를 주는 건 당연한 거예요'라며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부동산 초보자인 나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피가 왜 붙는지. 그리고 피를 왜 지불해야 하는지. 그렇게 부동산 아주머니는 '원래 이 집주인이 피를 그 이상 원했는데, 최근에 시세가 조금 떨어져서 1,000만 원으로 그나마 깎은 거예요. 이번에 놓치면 살 수도 없어요'.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조급해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왠지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나의 인연이 순간의 망설임으로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현란한 중개사 아주머니의 말솜씨에 혹해 나는 계약금을 넣어버렸다. '후회 안하실거에요. 주변에 아파트가 더 들어서고, 편의시설도 들어서고, 사람들이 북적북적 되면 이젠 이 금액으로 못사요. 아파트는 원래 그렇게 가격이 올라 가는거에요'. 그렇게 나의 첫 집은 마치 인터넷에서 10,000원짜리 물건 사듯이 순간적으로 결정이 되어 버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웃돈'으로 지불한 1,000만 원이라는 금액이 정말 손쉽게 내 수중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반대로 매도자는 한 번의 거래로 1,000만 원을 앉아서 벌었다는 사실을. 1,000만 원이라는 금액을 내가 모으려면 얼마나 절약하고, 아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인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정신적 충격이 상당히 컸다. 너무 허망해서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릴 정도였다. 이런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던 터라 오랫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다. 자본주의의 씁쓸한 현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
결국 '웃돈'과 각종 세금, 부대비용을 내고 나니 우리가 싹싹 긁어모은 금액 3억 원이 몽땅 분양권 거래로 소진되었다. 이렇게 나의 첫 집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을 했다. 대출 없이 집을 산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대출 없이 우리가 순수하게 모은 돈으로 집을 샀다는 자부심에 한껏 목이 뻣뻣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생태계에서 대출 레버리지 없이 내 돈만으로 무언가를 투자하는 행위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임을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