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그때는” 예뻤다는 말을 듣고 산다
지인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본다며 병문안을 갔고 병원에서 정말 오랜만에 예전 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한참 청춘이라 불리는 나이에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술도 마시며 뜨거웠던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이들이라 너무 반가웠다.
5년이 훌쩍 지나 만난 여느 지인들이 그렇듯 시시껄렁한 인사들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레 옛날 얘기가 나왔다. “십센치 힐이 자신감이라던 빨간 원피스의 그녀는 어디로 간 거야?” 한 친구가 나를 보며 물었다. 추억 속 ‘빨간 원피스’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방출되자 기억 속에 꽉 막혀있던 각자의 추억이 콸콸 터져 나왔다.
한 친구는 호피무늬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맨날 호랑이 잡아먹는 여자라고 놀려대곤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는 화장을 잘해 늘 경이로운 메이크업으로 주변인들의 시선을 샀다. 나는 그녀로 인해 다양한 속눈썹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임파선염이 심해 입원한 친구는 각선미가 뛰어나 늘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는데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곤 했다. 그리고 나는 하이힐과 원피스를 좋아했는데 아직도 크리스마스날의 빨간 원피스로 나를 기억하는 그들이었다. “현진 그때 진짜 예뻤는데, 톡톡 튀었어”
그러고 보니 우리, 모습이 많이 변해있었다. 호피무늬의 그녀는 더 이상 호랑이를 잡는다는 오명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고 아티스트의 경지에서 메이크업을 했던 그녀는 우리 중 그 누구보다 수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입원한 친구는 그때 미니스커트를 많이 입어서 그런지 체력이 많이 딸려 자주 잔병치레를 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구두를 신지 않는다. 한번 구두에서 내려온 여자는 다시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패션의 흐름은 바지의 안전지대에 입문하게 해 줬고 빨간 원피스는 내 옷장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그때는” 예뻤다는 말을 듣고 산다.
병문안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한 친구가 말했다. “요즘은 짜증만 늘어 가는 거야. 우리 하루에 몇 번이나 웃고 살까?” 우리는 모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고 대답 대신 나는 말했다. “우리 진짜 삭막하게 산다. 하이힐을 안 신어서 그런가, 이제 너무 안전한데 행복하지가 않아. 이렇게 흘러만 가다가 어느 날 육십 살이 돼 있으면 어쩌지. 아 진짜 무섭다.”
우리는 이제 지독한 편안함과 안정에 젖어 빨간 원피스와 호피무늬 스커트를 입지 않는다. 편안함과 안전함에 익숙해지면 웃을 일이 많이 줄어드는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에너지가 넘쳐 까져서 피 가흐르는 뒤꿈치를 혹사시켜가며 10센티 구두에 매일 올라탔던 때를 회상하며 길을 걷다 보니 지금 우리의 삶이 너무 건조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이렇게 계단식으로 성큼 몇 번의 변화를 거치게 되는 것도 같다. 처음 한 계단은 십 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두 번째 계단은 직장생활을 몇 년 정도 하고 있던 어느 날, 그리고 삼십 대 중반 즈음 세 번째 계단을 오른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변하다가 어느 날 성큼 한 계단 올라간다. 올라가고 나면 내려다보는 일만 가능할 뿐 다시 계단을 내려갈 수는 없다. 인생의 계단에서는 지나온 발걸음을 추억할 뿐 다시 내려갈 수는 없기에.
운동화를 신고 발걸음 가볍게 걸을 줄 알게 된 지금의 나는 아직도 인생길을 헤매고 있다. 어쩌면 더 막막하고 더 두려운 깜깜한 미래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피곤의 자욱을 지우는 방법을 알게 됐고 가벼운 운동화의 기동력을 얻었다.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고 속도를 조절하며 유동적인 움직임도 가능하다. 더 이상 반짝거리진 않지만 숨겨진 반짝이는 것들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그리고 같이 추억할 수 있는 존재가 늘어나면서 그들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삶이 풍성해지기도 한다.
며칠 전 마음까지 청순해질 만큼 맑은 봄날, 날씨가 좋아 그랬는지 새삼스레 발걸음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멈춰 서서 내 운동화를 한번 쳐다봤다. 너무 마음에 들어 찾고 찾아 사게 된 운동화였는데 착용감도 예술이라 한 번 더 ‘사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가던 길을 가벼이 재촉했다.
쓰는 아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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