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도르 Dec 31. 2019

Thank U Next!

[사표 쓰지 않는 여자들]의 2019년



마음속 희망이 현실과 갭이 너무 크다는 걸 인지한 후부터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냉소적인걸 '쿨하다'고 포장하며 사소한 따뜻함을 잃어갔다.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열 받고 안타깝고 허무했다. 그래서 내 눈에 보이는 욱하는 세상을 글로 썼다.


올해, 그 글들로 인해 많은 일이 생겼다. 그중에 가장 마음이 뜨거워졌던 일은 나에 대해, 여자의 일에 대해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KBS 다큐멘터리 출연이다.


KBS스페셜 [사표쓰지 않는 여자들]편에 출연했다


[KBS 스페셜] 팀에서 연락이 왔다. 브런치에서 "싹싹하지 말자"라는 내 글을 보고 연락하셨다며 글과 관련된 경험담을 들려주실 수 있냐고 했다. 그 한 통의 전화 인터뷰를 시작으로 꽤 여러 번의 촬영을 하게 됐다. 사람으로서, 여자로서, 회사원으로서의 나의 이야기를 무려 공중파에 하게 된 것이다.


촬영하는 동안 오랜만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삶의 온도는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것으로 인해 행복해지는지를 알게 되고 그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의 온도는 올라간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여자에 대한 불편함과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내 주위의 냉랭한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매번 큰 용기를 내야 했다. 싸울 준비를 해야 했고 외로워져야 했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미움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말하지 않고 넘어가면 문제없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여자의 유통기한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결혼을 안 하면 안 해서, 하면 한다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 변화를 외치는 게 껄끄러운 여자들, 변화가 두려운 남자들... 그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누군가가 상처 받는 일'이라고 말하며 사회생활을 한다는 건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여자 나이를 유통기한에 비유하는 말을 들으며 이를 갈았다. 유통기한이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디테일하게 짜인 '한국 여자 소설'의 결말을 바꾸고 싶었다. '출산'을 할지 말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다. 할지 말지 모르는 출산을 '어차피 해야 할'것으로 두고 이것저것에서 제외당하는 게 싫었다. 무엇보다 자꾸만 일터에서, 생계에서 사라지는 선배들을 보며 '나만 괴물인가'하는 생각에 외로웠다.


나는 "왕언니"라는 말이 싫다. 선배와 후배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사회에서 여자와 여자가 서로의 편이 되어주면 좋겠다. 여적여 아니라 여연 여, 그러니까 '여자의 연대는 여자'가 되면 좋겠다. 내 주변에 직접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여자 선배가 든든하게 나를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



이 촬영을 하면서 정말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선택에 의해 뭐든 할 수 있고, 무슨 말이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할 수 있는 한 명의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올해, 누군가는 내 책을 읽고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고, 티브이에 나온 나를 보고 다시 한번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며 울컥했다고 말했다. 나의 생각과 말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나의 고민들은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고 우리 모두 한 번쯤 해봤을 만한 고민이었던 것이다.



2019년, 절망과 기쁨의 무한한 간격 속에서


2019년, 절망과 기쁨의 무한한 간격 속에서 나는 조금 성장했다고 믿는다. 좋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직 나 자신으로 인해 생긴 일들이기에 온몸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커다란 기쁨 하나가 무거운 절망과 사소한 섭섭함 들을 빨리 잊을 수 있게 만든다.


작가라는 이름의 또 다른 내가 든든하게 저곳에 웃으며 서있다. 여기 있는 내가 아무리 섭섭해도 저곳의 내가 웃어주니 금방 떨치고 일어날 수 있게 된다. 2019년은 여러 가지의 나의 존재를 정의하고, 돌이켜볼 수 있었던 해였다.


2020년, 어쩌면 울거나 넘어지게 될 작가인 나를 든든하게 위로해줄 수 있도록 이곳의 나도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란다. 아직은 어설프고 부끄럽기만 한 새로운 나를 단단하게 붙잡을 수 있게 말이다.


[니체의 말] 제1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001
첫걸음은 자신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신을 대단치 안은 인간이라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 같은 생각은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옭아매려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맨 먼저 자신을 존경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을, 아직 아무런 실적도 이루지 못한 자신을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것이다. 자신을 존경하면 악한 일은 결코 행하지 않는다. (중략) 그렇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이상에 차츰 다가가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타인의 본보기가 되는 인간으로 완성되어 간다.


나를 비롯한 아직은 자신을 존경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더 좋아하고, 여러 가지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노래 [Thank you, Next!]의 제목과 가사처럼 지난 시간의 모든 고마움을 담아 이제 자신을 진짜 좋아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쓰는 아도르

사진, 글, 캘리그라피 adore
블로그 : http://jwhj0048.blog.me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adore_writing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이방인으로 태어났다가 자신으로 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