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보니 첫째
마흔이 되도록 동생과 나는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살았다. 먹는 것, 자는 것, 영화를 보는 것, 자기전 와인 한잔을 마시고 자는 것까지. 사이가 좋지 않은 날도 있었고 유별나게 잘지내던 날들도, 무관심하거나 서로를 증오하는 날들까지, 수많은 시간과 경험을 통과해온 어느날 우리는 한 달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쓰면서 말이다. 싸워도 하루 이틀이지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말을 하지 않은건 처음이었다. ‘자매’하면 연관검색어로 떠오르는 “언니 옷” 에피소드 조차도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나는 동생을 정말 좋아한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생이면서 때로는 언니처럼 든든한, 나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동생은 내가 자기 옷을 입는 것을 싫어했지만 나는 동생이 내 새옷을 꺼내 입는 것조차 뿌듯해 했다. 내가 받은 선물과 나에게 생기는 모든 것을 기꺼이 공유했다. 서른살, 한국을 떠나 독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옹졸한 월급으로 모은 몇천만원을 기꺼이 ‘우리’를 위해 사용했다. 그 후로 몇 년동안 어마어마한 생색으로 동생을 괴롭히긴 했지만.
나는 K-장녀의 정석으로, 이미 너무 심각한 첫째병을 앓고 있었고 동생은 그런 나에게 익숙해져 세상의 모든 언니들이 나같은줄만 알았다고 한다. 언니는 원래 다 양보하고, 다 사주고, 항상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줄로만 알고 있던 동생은, 한 달동안이나 말을 안하는 나를 낯설어했다. 사과도 늘 내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는 것도 늘 내몫이었다. 공유 공간에서의 침묵이 한달째, 집안의 어색한 공기를 피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인생 처음으로 동생이 먼저 사과를 하러 찾아왔다.
이번엔 진짜 내가 미안해.
근데 너도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야 알지.
늘 져주기만 했지 그렇게 화를 내고 먼저 사과하지 않는 내가 낯설었다고 했다. 언니는 늘 참고 동생에게 양보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커다란 일탈이었다.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왜 그때야 알았는지, 이번 만큼은 절대로 내가 먼저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던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콧대높은 동생이 먼저 사과를 한 이후 나도 조금씩 내 속마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장녀 노릇이 힘들다고, 엄마의 첫째에 대한 기대에 나는 늘 모자란 딸이어서 버거운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모든 생활을 같이 한지 30년만의 고백이었다.
언젠가 아빠에게 “아빠 나 엄마랑 못살겠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엄마는 늘 나에게 장녀 그 이상의 책임감을 요구했다. 엄마의 기대에 비해 언제나 부족하고 못난 딸이 되는 것이 힘들어, 엄마라는 존재는 나에게 늘 부담되는 자리였다. 어릴때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커서 엄마가 된다면 꼭 딸을 두명 낳아서 첫째가 존중받도록 해줘야지. 첫째도 존중받는 사람이란걸, 똑같은 아이란걸, 이기적이어도 된단걸 알려줘야지’ 과거의 일들을 두고 겨우 웃으며 말 할 만큼 시간이 흘러 섭섭했던 내색을 하면 엄마는 늘 내가 옹졸해서 그렇다고 했지만, 그건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첫째여서, 언니여서, 아이처럼 굴 수 없는 장녀의 결핍과 설움에 관한 문제다.
언젠가 티비에서 육아 예능프로를 보다가 가수 장윤정이 동생보다 첫째 아들을 주로 훈육하는 남편에게 하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자꾸 연우한테만 그래.
얘도 놀고 싶어서 그래.
얘가 원해서 장남이 된 게 아니잖아.
얘도 아기란 말이야.
어릴 때 엄마가 내게 그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이렇게 가슴 한켠에 뜨거운 돌맹이 하나가 자리 잡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이런 말을 들으면 울컥,하고 마음이 뜨거워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서럽고 힘든 순간 듣고 싶은 말의 전부는 그런게 아닐까.
“실수해도 괜찮다”
“뭐 그리 대단하게 잘못한 건 아니다”
“너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다”
“언니여도 아이처럼 굴어도 괜찮다”
쓰는 아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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