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담보다 재밌는
글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준 책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였다. 대단하다는 사람들 중에 '가장'이라는 부사가 붙어도 놀랍지 않을 역사적 인물의 편지 속에서 나의 우울과 나의 실패를 발견했던 것이다. 처음엔 놀라웠고 그다음엔 안도했다. 그때까지 나는, 나만 실패하고 나만 내자신에게 실망하며 사는줄 알았다. "나만"의 덫에 갖히면 점점 더 깊은 불행의 늪속으로 빠진다. 깊고 깊은 산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사람처럼. 실패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을 반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속에서 처음 발견한 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속에 길은 없어도 누군가의 실패담은 늘 존재했다. 심지어 작가들은 그 실패를 이야기하고, 글로 쓰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 서슴없이 세상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내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즈음 이었다. "나도 내 이름으로 된 책 한권 낼거야. 마흔이 되기 전에" 라고 직장 동료에게, 후배에게, 친구에게 말하게 된 것.
말로만 떠들었지 본격 '글을 쓴다'는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책을 내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순서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내기 바빴다. 불행을 적립하고 절망하기 바빴다. 나의 슬픔과 불행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메모했지만 누가 그 불행한 글을 보겠나 싶어 찢어버리기 급급했다. 누군가의 실패는 찾아서 읽으면서 내 실패만큼은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다. 숨겨야만 했다. 나의 실패를. 그시절 나의 취미는 '버리기'였고 특기는 '삭제하기'였다. 나의 하루와, 나의 실패와, 내 실패를 아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수시로 버리고 삭제했다. 그렇게 혼자가 된 나는 어떤 공간이 필요했다. 나의 소중한 슬픔을 글이라는 오직 한가지 형태로 꺼내놓을 수 있으면서 아무도 보지 않을 대나무숲 같은 비밀 공간. 그때 내가 선택한 공간이 바로 브런치다. 가끔 빨간 하트를 누르고 지나가는 행인이 몇 있을 뿐, 글쓰기 외엔 어떤 동작도 필요 없는 이 하얀 공간이 고요해서 좋았다. 나의슬픔과 실패를 글로 쓰는 일, 그렇게 시작됐다.
그날로부터 2000일 가량이 지났고 한달전 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지나가기]라는 세 번째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12월 밀리의 서재에서 네번째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다. 나의 3호 책을 마감하고 표지 디자인을 고민하면서 어떤 책이 됐으면 좋겠냐는 편집자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실패담 같은 책이요
사실은 서점에 즐비한 위로들이 적잖이 지겨웠다. 위로조차 경쟁이 되는게 싫었다. '위로'라는 단어를 내세워 어떤 책이 더 위로가 되냐는 식의 카피가 내책에 달리지 않았으면 했다. 실용적이기를, 진정성이 있기를 바랐다. 진짜 위로는 언제나 우연히 발견한 문장 속에, 예상치 못한 만남 속에, 나의 주먹을 펴주는 용기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 책만큼은 위로가 아닌 그냥 누군가의 실패담이기를, 읽고 나면 '나 뭐 그렇게 불행한 것도 아니네'하고 가벼워지기를 바랐다. 책속에, 내 글들속에 그 뜨거운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가만히 기다리고 싶었다. 내일은 아니겠지만 지금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앉혀놓고 들려주고 싶었다.
울면서 들어봐,
내가 얼마나 찌질한지,
내가 얼마나 많이 실패하는 사람인지 말이야
네 권의 책 모두 브런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브런치에 발행된 150여개의 글 99프로가 책이 되었단 소리다. 나의 소중한, 크고 작은 실패담 모두가 '완판'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쁜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지 못했음에도 계속 쓸 수 있는 나의 실패가 여전히 풍부하다는 것이고, 더욱 기쁜 사실은 브런치에 내삶의 실패담을 계속 쓰면 누군가 한사람쯤은 그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내심과 지속력을 지니고 이건 내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라고 수없이 자신에게 되뇌이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내가 글을 쓰면서 즐거우면 그것을 똑같이 즐겁게 읽어주는 독자가 틀림 없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지 않은가. 그 사람들과 멋지게, 깊숙이 서로 마음이 통했다면 그걸로 일단은 충분하다." 라고. 나의 세번째 실패담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지나가기]는 한달 전에 출간됐다. 이제와 출간을 알리는 글을 쓰며 브런치에 쓴 '첫 글'을 복기해보는 이유는, 글을 쓰는 나의 자아가 요즘 지쳐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이자 이미 유명한 작가인 그의 자잘한 실패담이 담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다시 꺼내 읽어본 이유이기도 하다. 회사원인 내가 또 너무 많은 삶의 지분을 차지했기 때문일까, 나의 글쓰기와, 책과, 몇 안되는 나의 독자를 잊고 지냈다. 물론 글쓰기를 포기한 적은 없다. 다만 좋아하는 닭다리를 먹듯 글을 썼던 내가 싫어하는 뻑살을 억지로 먹듯 글을 쓰다가 나의 즐거움을 잠깐 잃었다. 내가 좋아하는건 분명 닭다리인데 말이다.
글쓰는 즐거움을 다시 뜨겁게 살리기 위해 나의 사랑하는 3번째 실패담 출간 소식을 한달이나 늦게 전한다. 한번도 중쇄를 찍은 적이 없어 내 글을 의심했고, 나의 반짝이는 실패담을 잠깐이나마 부끄러워 했다. 나는 또 실패하는 책을 만드는 작가인가, 작가인건 맞는건가 하는 생각들로 새로운 실패를 맞이하고 있었다. 역시 나는 실패하는 사람이다. 실패가 쌓여야 슬퍼지고 그 슬픔으로 또 글을 써야 하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기는 쉽지 않다"라고 했다.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로서 버티기가 이렇게 어려운줄 몰랐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손톱 끝도 안되지만 내 세번째 출간을 자전적으로 축하하고 즐기며 오늘 밤부턴 나에게도 그처럼 이렇게 말하며 버텨볼 것이다.
이건 내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내가 즐거우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다시 즐기라.
나의 슬픔을 글로 쓰는 것을.
쓰는 아도르
사진, 글 ad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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