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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Jan 20. 2024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의 이름을 불러본다.

            

대부분의 강아지가 그렇듯이 우리 강아지도 산책을 좋아한다. 산책로에서 꼬리를 바짝 세우고 귀를 팔랑이며 신나게 걷는 강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귀찮아도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강아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흥미롭다는 듯 참견을 하고 코를 갖다 댄다. 강아지와 함께 걸으면 내 시선도 저절로 강아지가 보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평소 무심코 스치던 모든 평범한 것들이 특별하게 보인다. 작은 들꽃이 강아지의 몸을 스치며 흔들리고 강아지 발에 밟힐 뻔한 개미는 혼비백산 도망친다. 내 앞에서 신나게 걷던 강아지가 하천에 내려앉은 커다란 두루미에 깜짝 놀라 내게 도망을 온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두루미를 바라본다. 내 쪼그만 강아지가 무심한 내게 가르쳐 주는 듯하다. 이 길 위에서 만나는 많은 존재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말이다.     

 

그림책에서 의인화된 지하철은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소개한다. 예쁜 딸 한 번 더 보느라 출근길은 늘 꼴등인 완주 씨, 딸과 손녀들을 위해 해산물이 가득 든 보따리를 들고 육지에 온 제주도 해녀 할머니, 아이 둘을 키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유선 씨, 구두 수선을 하는 구로동 재성 씨 등등 일상에서 스친다면 너무나 평범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마음이 들지도 않을 것 같은 그들을 지하철은 한 명 한 명 이름을 호명하여 독립된 인격체로 우리 앞에 세운다. 이름을 듣는 순간 우리는 집중하게 된다. 군중 속 익명의 존재로 스칠 뻔한 그들을 멈춰 서서 바라보는 중요한 순간이다.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바당에서 나고 자랐수다.

  바당은 아방같이 무섭기도 하고양 어멍같이 너르고 똣똣하우다.

  바당은 많은 걸 가르쳐 줘수다. 기쁨도 주고양 슬픔도 줘수다게

  똘 좋아하는 뭉어영 똘의 똘 좋아하는 전복 잡앙 육지에 와시난.

  얼른 강 맛 존 밥 차려 주크라.”         

 

꼬부랑 할머니의 담담한 독백은 인생, 그 자체이다. 할머니는 그 긴 세월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냈을까. 무섭기도 너르고 똣똣하기도 한,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주는 할머니의 바다는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있다. 나는 대가족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참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헌신적인 부모의 돌봄은 부족할 것이 없었다. 내가 8살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빠가 시골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학교 옆에 딸린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사택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어야 했던 그 시절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 나는 내 인생 가장 행복한 2년을 보냈다. 내가 하교를 하면 우리 삼 남매는 누렁이와 해가 질 때까지 들로 산으로 다니며 놀았다. 그러다 밤이 되면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엄마가 튀겨주시는 뜨거운 도넛을 후후 불며 맛있게 먹었다. 양복을 입은 아빠가 양손에 책 꾸러미와 장난감 볼링 세트를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대체적으로 즐겁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놀이터였다.

  

시골의 사택을 떠난 이후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쭉 도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다정하지 않은 세상에 놀라고 주눅 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 상태로 사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나는 왜 하필 나로 태어났을까’라는 의문만이 머리에 가득했다. 찬란했던 사계절의 흐름과 인생의 다정함이 바래져 버렸다. 우리는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견뎌야 하기에 순수했던 한 시절을 그리워하나 보다. 그래서 이 그림책을 보며 깊숙히 가라 앉아 있던 그 시절의 '나'에 대한 기억들이 두둥실 두둥실 떠올랐나 보다. 


그림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영 씨가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질그릇 도에 옥구슬 영, 겉모습은 투박해도 마음속에 항상 밝고 빛나는 것을 담은 사람이 되라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나는 올해로 스물아홉 살이 된 이도영입니다.’


나의 아버지도 큰 딸이 시련에 넘어지지 않는 기쁜 삶을 살아가길 바라며 기쁠 희에 소나무 송, 희송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나는 너무 오래도록 기쁘게 살지 못했음에 슬픔이 밀려들었다. 태어날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을 생각하며 부모는 아이의 삶을 축복했겠지. 세상이라는 너른 바다에 던져질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골랐을 것이다. 그 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미워할 수 없다. 타인의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가 없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를 축복한 누군가의 마음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라 생각하니 소중하지 않은 인생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기에 무명의 존재로 전락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아빠의 축복은 유효하다. 나는 인생의 허무를 딛고 일어서 인생의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것이다. 폭풍우 치는 무서운 날도, 따스한 햇살이 감기는 평화로운 날도 있겠지. 그러나 그 모든 날들에 감사할 것이다. 허무한 인생을 감사로 바꾼 신비는 어디에서 올까. 그것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함께 손 잡고 그 답을 찾아갈 수 있다. 그림책 하브루타는 그 시작이 되어줄 것이다. 그림책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삶을 깊이 이해하는 동시에 내면의 나를 일으켜 세우고 위로할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시골 학교의 허름한 사택에서 나는 왜 행복했을까. 그 시절은 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을까. 돌아보니 그곳엔 서로의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이 있었다. 너무 오래도록 세상은 내게 가혹하다는 자기 연민에 매몰되어 나를 둘러싼 아름다운 것을 잊었고, 또 새로이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 시간을 건너 이제 나는 내 이름을 불러본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내 이름과 연결된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하나로 연결된 타인과 나는 다정한 마음을 나누며 인생의 다채로움을 맛볼 것이다.  


나는 오늘도 강아지와 산책하며 이름 모를 들풀과 강아지 발아래를 지나가는 벌레들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지하철 안에서 만나는 이들도 더 이상 익명의 군중이 아닌 지하철이 하나하나 호명해 반기는 소중한 인생들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세상 모든 이름에 담긴 이야기를 향한 나의 축복이 그들의 영혼에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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