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란느

오색찬란

by 미정의 서

여행에 흥이 빠질 수 없으니 셋째 날 주제는 흥으로 뽑았다. 다섯 가지 색, 다섯 가지 맛으로 흥을 돋우기에는 김밥이 최고다. 속에 들어갈 재료를 전날 밤부터 고민하더니 색을 맞추느라 그 공을 들였던 거다.

결혼 후 가끔씩 엄마의 김밥이 그리울 때면 친정으로 달려갔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김밥 대신 유부로 초밥을 싸주셨는데, 딸이 김밥에 미련을 표하면 엄마는 얼른 김밥집을 다녀오신다. 재료 손질부터 그만큼 수고스러운 요리다. 평생 살림만 하시던 엄마도 손 놓은 김밥을 남편이 준비한다 하니 걱정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함께 곁들일 국수까지 말아 상을 차리려니 벨이 울린다. 여행 중 반가운 손님이 들렀다. 인터폰 모니터를 환하게 밝히는 이는 내 오랜 친구 란느다. 여느 때처럼 두 손 가득 디저트를 챙겨 나의 공간을 찾았다. 란느는 우리만의 애칭이다. 잘 모르는 이들은 내가 ‘란느’라 명명하면 외국인 친구냐고 묻는다. 그러면 우린 잠시 낄낄거리다 유창한 한국말로 질문에 응한다.

10주년 우정을 기념하던 해, 우리는 함께 런던으로 향했다. 마침 일이 있어 런던의 갤러리를 탐방해야 하던 때라 란느도 긴 휴가를 내어 동행했다. 이틀 먼저 런던 서쪽 헤리티지 플레이스에 짐을 풀고 란느가 오기를 기다렸다. 히드로 공항으로 마중가는 길에 사우스 일링을 지나야 하는데, 그곳 다리에서 찍어 둔 런던의 밤은 어딘가 모르게 초현실적이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붉은색 벽돌 난간이 대비를 이루는 낮 시간의 선명한 풍경이 달을 드리운 얇은 구름 커튼의 회색조로 뒤바뀌면 사우스 일링은 마치 실재하는 <빛의 제국>인 것만 같다. 그림 같은 풍경은 우리가 런던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고, 집을 내어 준 언니는 그런 날씨를 우리가 선물 받았다고 했다.

여성의 우정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회의적이다. 나도 그리 폭넓은 우정의 역사를 갖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느와 함께 한 시간들은 식탁에 오른 김밥 재료만큼 오색찬란하다. 처음엔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오랜 강의에 지칠 대로 지친 어느 학기, 란느의 반짝이는 두 눈이 연구자의 마음가짐을 되찾게 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새로운 책과 자료를 뒤적여야 했고 그 시간이 내겐 더없이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10년의 시간은 내 사진첩에 고스란히 남아 코로나로 잊고 있던 우리의 기록을 들추어낸다. 함께 했던 달이면 어김없이 그녀의 얼굴이 아이폰 화면을 채우고 어쩌다 보니 그런 날이 열두 달 중 가장 많다. 내게는 남편보다 란느와의 기억이 더 다채로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친구가 되었지만 여전히 오월이면 첫 만남의 시절로 돌아가 진심을 담은 감사를 전한다. 어떤 때는 직접 케이크와 쿠키를 구워 정성스레 포장해 오는가 하면 화원의 꽃들을 사다 부케를 만들어 안기기도 한다. 한 번은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과 보라색 실을 섞어 얇은 목도리를 떠 주었고, 또 등나무 줄기를 엮고 빨간 가죽 손잡이를 멘 멋스러운 가방을 직접 디자인해 선물하였다. 계절마다 필요한 아이템 하나씩 안 받아본 선물이 없다. 그것은 피카딜리 역으로 향하는 하이힐 소리를 잠시 멈춰 세우던 화려한 명품들보다 값지고 귀한 것들이다. 귀여운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문장 하나가 아직도 내 책장 한편에서 웃어 보인다.

“미란느 할머니 될 때까지 선생님 귀찮게 하며 살아야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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